XpressEngine ver.2

글 수 1,141
2015.11.20 11:24:37 (*.96.151.82)
6306
  등록 :2015-11-19 19:04
출장 갔던 파리의 스산한 가을비가 떠오른다. 낯설지 않은 도시라 11·13 테러의 현실감이 더한 걸까. 그곳에서 만났던 행복한 얼굴들을 생각하면 더 슬퍼진다. 하지만 내게 훨씬 낯익고 소중한 도시는 서울. 파리를 유린한 테러라는 야만보다 서울의 스산한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또 다른 야만의 그림자에 가슴이 더 서늘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오래지 않은 과거에 저 테러보다도 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응답하라 1988’의 시대. 광주에서 파리 테러보다 더 많은 시민이 죽임을 당했다. 사진 속에서 웃는 파리의 희생자들처럼 그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미래를 꿈꾸고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의 진실을 나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알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5·18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언론도 입을 다물었다. 기껏 들었던 건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대가 진압했다는 풍문뿐이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했을 뿐인 시민들을 학살한 자는 교과서에 정의사회 구현의 지도자로 묘사됐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독재란 그런 것이었다.

파리를 유린한 야만에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이 땅을 유린했던 또 다른 야만에 대해선 무감해진 듯하다. 그 둘은 너무나 닮아 있음에도. 테러가 보통 범죄와 다른 것은 정치적·종교적 목적을 위해 저질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조직적이고, 죄의식조차 없기에 더 잔인하다. 독재 역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테러리스트들의 신조인 근본주의와도 닮았다. 자유를 질시하고 다른 생각을 억누르며 인류 문명의 성취를 부정한다. 한 가지, 독재가 테러보다 더 끔찍한 건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시민을 해친다는 점이다.

지금 서울에서는 그 독재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친다. 인류 문명이 ‘아니다’라고 결론 낸 걸 ‘맞다’고 우기는 것부터 그렇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얘기다. 집권세력과 다른 생각은 침묵시키겠다는 발상이 근본주의적이다. 국민의 저항을 진압하는 방식도 독재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아니, 더 독하다. 과거 군사정권은 시위 진압으로 사람이 상하면 움츠리기라도 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데, 집권세력은 “미국 경찰이 총을 쏴서 시민들이 죽어도 80~90%는 정당하다”고 뇌까린다. ‘폭도’라고 윽박지른다. 5·18을 기억한다면 차마 할 수 없는 짓들이다.(곁가지이지만, 시위의 불법성 시비에 대해 언급하자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표현의 자유는 불안상태를 유발하고 불만을 조성하고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시위대의 주장이 아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결문에 쓴 말이다. 텍사스 대 존슨. 1989년)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파리 시민들은 평소처럼 카페 테라스에 앉아 담소함으로써 테러와 맞서고 있다. 테러분자들을 소탕하는 것 못지않게 그들이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재가 싫어하는 바이기도 하다. 독재는 거꾸로 테러를 빌미로 자유를 옥죄기도 한다. 그래서 테러와 독재는 또 닮은꼴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두 야만과 싸워야 한다. 테러를 증오하되 자유를 지키며 삶의 다양성을 높이고 사랑과 우애를 나누며 독재를 조롱하자. 어떤 이들은 이슬람국가(IS)를 없애도 또 다른 괴물이 나올 것이라고 절망한다. 독재의 유전자 또한 절망스럽게도 질기다. 그러나 인류는 본디 야만과 싸우며 문명을 세우고 지켜왔다. 때로 외부의 야만과 싸웠고 더 자주 내부의 야만과 싸웠다. 그게 우리가 인간의 고귀함을 얻은 방식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번호
제목
글쓴이
1041 “아들, 엄마 꿈속에 한번만 와줘…”
[관리자]
2014-06-19 4616
1040 엄마 일 많이 도와줬지…꿈에 장가 보내 달래서 슬펐지만 부디 행복하길
[관리자]
2014-12-30 4617
1039 그 힘과 만나보십시오
들국화
2014-04-10 4622
1038 엄마 주름 마사지로 펴주겠다던 딸, 긍아! 그 아름다운 꿈 잃고 천사가 돼 왔구나
[관리자]
2014-07-09 4622
1037 전주 고교생들, ‘세월호 유가족 십자가 순례단’ 맞아, 신부 수녀 시민 등 500여명 참여해 ‘거리 미사’ 올려
[관리자]
2014-08-11 4622
1036 두산 유니폼 걸어놓고 하염없이 기다렸는데…천국에선 꿈 이루거라
[관리자]
2014-12-17 4622
1035 누운 아빠 엄마 사이에 잼처럼 쏙 끼어들던 막내…지금도 들어올 것 같은
[관리자]
2014-12-22 4624
1034 보고싶다, 외치고 나니 더 아프다
[관리자]
2015-04-13 4624
1033 새 책! 『예술과 공통장 : 창조도시 전략 대 커먼즈로서의 예술』 권범철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4-02-12 4624
1032 "교황님, 제발 세월호 특별법 바꿔주세요"
[관리자]
2014-08-08 4625
1031 [한겨레 프리즘] 잊지 않겠습니다 / 허호준
[관리자]
2014-07-30 4626
1030 딸아, 꿈 속에 한번 와줘. 누나, 천국은 어때? 안 아프고 행복해야 돼!
[관리자]
2014-11-04 4626
1029 초대! 『예술과 공통장』 출간 기념 권범철 저자와의 만남 (2024년 3월 31일 일 오후 2시)
도서출판 갈무리
2024-03-27 4626
1028 엄마 생일 챙기던 딸…오늘은 너의 생일이네…네 사진과 얘길 한단다
[관리자]
2014-10-28 4627
1027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는 시간 / 하성란
[관리자]
2015-01-31 4627
1026 한겨레[특별기고] 희망의 새 역사 기약하는 해방 70년 되길 / 안병욱
[관리자]
2015-01-01 4628
1025 항상 건강하고 의젓했던 나의 조카…너무도 크구나, 네가 떠난 빈자리
[관리자]
2014-07-25 4629
1024 세월호 농성 도중 경찰관 때린 유가족 1명 연행
[관리자]
2015-03-31 4629
1023 침몰하던 그 시각 “사랑해요“ 마지막 문자…딱 한 번 볼 수 없겠니?
[관리자]
2014-12-18 4631
1022 아빠 엄마 생일에 깜짝파티 해주던…우리 가슴에 늘 있는
[관리자]
2015-01-05 4631

자유게시판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