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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9-13 16:36수정 :2015-09-13 20:22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4회 도쿄 납치 <하>
1973년 8월8일 낮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뒤 행방이 묘연했던 김대중은 5일 9시간 만인 8월13일 밤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혼자 돌아왔다. 김대중은 안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희호에게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체험했다”고 고백했고, 부부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거울 앞에 서 있는 큰아들 홍일과 누워서 자고 있는 막내 홍걸도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3년 8월8일 낮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뒤 행방이 묘연했던 김대중은 5일 9시간 만인 8월13일 밤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혼자 돌아왔다. 김대중은 안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희호에게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체험했다”고 고백했고, 부부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거울 앞에 서 있는 큰아들 홍일과 누워서 자고 있는 막내 홍걸도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3년 8월8일 오후, 모르는 목소리의 전화를 받은 이희호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 뒤 남편의 친구인 재일동포 김종충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종충은 김대중이 도쿄에서 납치를 당했으며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2년 전 남편을 덮친 교통사고가 생각났어요. 극심한 불안으로 간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지요.” 그때 동교동 집에는 공군 소위로 출퇴근하던 큰아들 홍일, 초등학교 3학년 막내아들 홍걸이 있었다. 둘째 홍업은 학군단(ROTC) 과정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경남 언양에서 근무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다. 퇴근한 홍일은 아버지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 하고 꿇어앉아 통곡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이희호는 운전기사와 함께 무작정 일본대사관저를 찾아갔다. 밖에서 경비를 서는 한국 경찰이 신분을 묻더니 대사가 쉬고 있다며 연락하는 것조차 막았다. 이희호는 필동 큰오빠 이강호 집으로 갔다. 미국 방송에서 무슨 소식이든 나오면 알려 달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을 꼬박 새운 이희호는 다음날 일본에 가게 해 달라는 진정서를 써 외무부를 방문했다. “윤석헌 차관이 나를 만나줬어요. 집에 가 있으면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지요. 다음날 윤 차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남편의 소재가 확인된 다음에 일본에 가라고 하는 거예요. 뻔한 말이었지만, 정부 고위관리가 답을 해준 경우는 처음이어서 그 말도 고마웠지요.”

외무부를 나온 이희호는 다시 진정서를 작성해 국무총리실로 찾아갔다.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심어주고 있으니 기관원들을 우리집 주위에서 철수시키고,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여권을 발급해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어요. 김종필 총리가 지방출장 중이라고 해서 서류만 두고 왔는데 결국 아무 답이 없었어요.”

김대중의 구사일생 생환기는 동교동으로 몰려든 국내외 기자들에 의해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이 손목 발목 등 온몸의 생생한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의 구사일생 생환기는 동교동으로 몰려든 국내외 기자들에 의해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이 손목 발목 등 온몸의 생생한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일본 언론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납치 후 3시간이 채 안 된 오후 3시50분에 <엔에이치케이(NHK)방송>에서 뉴스 속보 자막으로 ‘김대중 납치·실종’을 알렸다. 일본과 미국의 주요 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했고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졌다. 이튿날 일본 신문들은 김대중이 도쿄 시내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통일당 총재 양일동을 만나고 나오다 한국말을 하는 괴한들에게 납치당했고 일본 전역으로 수사망을 폈으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세히 보도했다. “걱정이 된 손님들이 집으로 찾아들었어요. 또 미국 <시비에스(CBS)방송>, 일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을 비롯해 외신 기자들이 몰려와 집 안이 북새통이었어요.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어요.” 한국 언론은 유신독재에 짓눌려 이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암흑 속에서 이희호는 남편이 살아 있기만을 눈물로 빌고 또 빌었다. “몇 달 전 우리집 바로 옆으로 이사 온 창천교회 임명례 권사가 많은 분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해주었어요. 부흥회 강사로 이름이 높던 이천석 목사가 기도를 하던 중 환상을 봤는데 남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김대중이라는 이름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기도 했지요.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어요.”

납치 소식에 외신기자만 북새통
한국 기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김종필 국무총리실로 찾아가
도움 요청했지만 역시나 무응답

범행 현장엔 큰 배낭 2개와 밧줄
살해한 뒤 운반할 도구들이었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배에 태웠다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였다
두 손·발목에 쇳덩이가 채워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앞에 바로 서 계셨다
아직 제게 할 일이 남았습니다
소매를 붙들고 살려달라 매달렸다”

갑자기 사람들이 “비행기다” 외치고
누군가 속삭였다 “이젠 살았습니다”

납치 닷새 뒤 집으로 돌아온 남편
핏자국과 피멍, 너무나 초췌했다
6년보다 더 길었던, 그 6일이었다

11일 오전 이희호는 일본대사관을 방문해 우시로쿠 도라오 대사를 만났다. “일본 수사력이 세계에서도 우수하다는 말을 듣는데, 왜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느냐며 속히 진상을 파악해서 알려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요.” 그렇게 말은 하고 나왔지만 이희호는 벽에 대고 소리치는 듯한 느낌만 받았다. “나는 직감으로 중앙정보부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지요. 남편이 납치돼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던 그 6일이 6년보다 더 긴 세월 같았지요.”

이희호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어 13일에는 국제적십자사에 여권을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류를 작성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어요. 안방에서 지인들과 함께 여권 요청 서류를 정서하고 있는데, 응접실 쪽에서 뭔가 쳐들어오는 것같이 쿵쿵쿵 하는 소리가 났어요.”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선생님이 오셨어요?” 사람들이 마당으로 몰려 나갔다. 그때 김대중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종된 지 5일 9시간 만이었다.

김대중이 납치당한 그랜드팰리스호텔에는 통일당 총재 양일동과 통일당 의원 김경인이 묵고 있었다. 양일동의 방은 2211호실, 김경인의 방은 2028호실이었다. 김대중은 양일동과 만나기로 약속한 대로 8월8일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뒤 호텔에 도착했다. 경호원 김강수가 1층 로비에서 대기했다. 12시가 넘어 김경인이 양일동의 방으로 왔다. 김경인은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터였다. 세 사람은 방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1시15분께 김대중은 2시에 일본 자민당 의원 기무라 도시오와 만날 약속이 예정돼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대중을 배웅하러 김경인이 문을 열고 뒤따라 나왔다. 그때 옆방 2210호실과 맞은편 방 2215호실에서 체구가 건장한 남자 여섯명이 나오더니 두 사람을 덮쳤다. 서너 사람이 김대중의 멱살을 잡고 2210호실로 밀어 넣었고, 김경인은 나머지 괴한들에게 잡혀 양일동의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양일동이 놀라 “뭐 하는 짓이냐? 어디서 왔느냐?” 하고 소리쳤다. 남자가 반듯한 서울말로 답했다.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국내 문제니까 조용히 처리합시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양일동과 김경인은 괴한들에게 붙들려 있느라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들은 김대중을 2210호로 끌고 들어가 침대에 팽개친 채 마취제를 적신 손수건을 코에 대고 눌렀다. 또 목을 짓누르며 두 손을 꺾어 밧줄로 묶었다. 김대중은 한순간 정신을 잃었으나 다시 깨어났다. 마취제가 듣지 않았다. 한 사람이 한국말로 협박했다. “조용히 해라. 말을 안 들으면 죽여 버리겠다.” 조금 있다 괴한들은 다시 양쪽에서 김대중을 팔을 끼고 2210호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던 중 젊은 남자 두 명이 탔다. 김대중은 일본말로 “살인자다! 구해 달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남자들은 두려웠는지 7층쯤에서 다시 내리고 말았다. 지하주차장으로 나온 괴한들은 미리 대기한 승용차 뒷좌석에 김대중을 태운 뒤 바닥에 앉히고 다리로 머리를 눌렀다. 승용차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1시20분께였다.

1973년 8월8일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은 오사카항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사진)에 실려 이틀간 바다에 떠 있는 동안 ‘수장’될 뻔했다. 김대중은 죽음의 위기를 절감하고 “살려 달라”고 속으로 절규하던 순간 ‘비행기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훗날 증언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3년 8월8일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은 오사카항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사진)에 실려 이틀간 바다에 떠 있는 동안 ‘수장’될 뻔했다. 김대중은 죽음의 위기를 절감하고 “살려 달라”고 속으로 절규하던 순간 ‘비행기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훗날 증언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층 로비에 있던 경호원 김강수는 2시가 되어도 김대중이 내려오지 않자 22층으로 올라갔다가 김대중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수석비서 조활준을 비롯해 김대중의 비서진은 2시40분에 경찰서에 납치신고를 했다. 사건을 접수한 일본 경시청은 3시15분께 전국 경찰에 긴급 상황을 알렸다. 경찰과 기자들이 거의 동시에 범행 현장에 도착했다. 범행 장소인 2210호실에서 대형 배낭 2개와 밧줄이 발견되었고 북한제 담배도 나왔다.

나중에 경찰의 정밀수사로 범행 현장 욕조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1등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이 채취되었다. 큰 배낭이 두 개나 발견된 것으로 보아 김대중을 2210호실 욕조에서 살해한 뒤 토막 내 배낭에 실어 운반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북한제 담배는 북한 공작원들의 소행으로 꾸미려고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였다. 김경인이 일찍 돌아와 배웅을 하러 나오는 바람에 김대중을 현장에서 살해한다는 계획이 틀어졌음이 분명했다.

김대중을 태운 승용차는 고속도로를 서너 시간 달린 뒤 오사카 방향으로 틀어 한 시간쯤 더 달렸다. 저녁때가 되어 승용차는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 빌딩 주차장에 멈췄다. 김대중은 다다미가 있는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납치범들이 “안(安)의 집”이라고 부른 그 집은 오사카총영사관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었음이 뒤에 밝혀졌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신발도 운동화로 바꿔 신긴 뒤 다시 끈으로 몸을 묶고 화물포장용 테이프로 얼굴만 남기고 몸 전체를 감았다.

두 시간쯤 지나 밤이 깊어지자 김대중은 다시 차에 실려 항구로 옮겨졌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모터보트에 태우고 얼굴에 보자기를 씌웠다. 김대중은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끼고 묶인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그러자 납치범 중 한 명이 김대중의 배를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납치범들은 모터보트로 한 시간쯤 달린 뒤 김대중을 큰 배로 옮겼다. 그때 “12시50분”이라는 말이 들렸다. 나중에 그 배는 중앙정보부가 공작선으로 사용하던 용금호로 밝혀졌다.

납치범들은 배 위에서 다시 김대중을 마구 때렸다. “그만하시오. 때릴 필요 없소.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오.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을 때릴 필요는 없지 않소.” 구타가 그쳤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선실로 끌고 가 몸을 더 꼼꼼하게 결박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아 묶고 두 발도 묶었다. 칠성판 같은 판자 위에 눕히고 몸을 세 군데로 나눠 송장처럼 묶었다. 입에 나뭇조각을 물린 뒤 붕대를 두르고 두 손목과 발목에 각각 30~40㎏짜리 쇳덩이를 달았다. 다시 몸 전체를 밧줄로 촘촘히 묶었다.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이불로 싸서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던데.” 이런 말들이 오갔다. 김대중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고 느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상어에게 하반신이 뜯겨 상반신만 남더라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와이셔츠 차림에 온몸이 멍든 채 돌아온 김대중의 초췌한 차림은 그가 겪은 생사의 고비를 증명해주었다. 이희호가 남편의 터진 입술에 약을 발라주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와이셔츠 차림에 온몸이 멍든 채 돌아온 김대중의 초췌한 차림은 그가 겪은 생사의 고비를 증명해주었다. 이희호가 남편의 터진 입술에 약을 발라주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바로 그때 김대중의 눈앞에 예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김대중은 그때의 체험을 여러 차례 생생하게 증언했다. “나는 기도드릴 엄두도 못 내고 죽음 앞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 계셨다.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고, 표정도 그대로였다. 옷도 똑같았다. 나는 예수님의 긴 옷소매를 붙들었다. ‘살려 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나는 세례를 받은 후 처음으로 예수님께 살려 달라, 구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 순간 붕대에 가려진 김대중의 눈에 붉은빛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엔진 소리가 폭발음처럼 커지더니 배가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비행기다” 하고 외치며 갑판으로 뛰어 올라갔다. 배는 30~40분쯤 달리다 속도를 줄였다.

“김대중 선생님 아니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다가와 물었다. 경상도 사투리였다. “나는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부산에서 선생님을 찍었습니다.” 그러더니 남자는 김대중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생님은 이제 살았습니다.” 김대중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도쿠시마 근해입니다.” 오사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배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바다에 떠 있다가 11일 새벽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김대중의 몸을 묶은 밧줄은 풀렸으나 눈은 여전히 붕대에 가려져 있었다. 배에서 내린 범인들은 김대중을 차에 싣고 몇 시간 동안 달린 뒤 농가로 보이는 한적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12일 김대중은 서울 근교의 중앙정보부 안가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하루를 보냈다.

13일 저녁이 되자 누군가 다가와 김대중에게 말을 걸었다. “김대중 선생, 얘기 좀 합시다. 왜 선생은 해외에서 국가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겁니까?” 김대중이 대답했다. “나는 한 번도 대한민국에 반대한 적이 없소. 내가 반대하는 것은 독재정권이지 국가가 아니오.” “국가가 정권이지 국가와 정권이 다를 게 뭐요?” 퉁명스러운 말에 김대중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는 김대중을 집 근처에 풀어줄 것이니 눈을 가린 붕대를 풀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라고 했다. 김대중을 태운 차는 두 시간 동안 달린 뒤 멈추었다. 김대중은 차에서 내렸다. 한참 뒤 눈을 가렸던 붕대를 풀었다. 동교동 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이었다. 1972년 10월11일 출국해 죽음이 코앞에서 어른거리는 지옥의 어둠을 지나 집에 이르렀다. 열 달 만이었다. 대문 앞에 선 김대중은 초인종을 눌렀다. “나다, 나야.”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우르르 몰려 나왔다.

안방에서 뛰어나온 이희호는 막 들어서는 남편을 보았다. “방문을 열고 나와 현관 쪽으로 가는데 그때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도무지 현실이 아닌 것 같고 환상 속에 서 있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입이 열리지가 않았어요.” 김대중은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내의 손을 잡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남편의 모습이 너무나 초췌했어요. 입가가 터져 핏자국이 어려 있고, 손목에 피멍이 들어 있었어요. 양복 윗도리도 없어지고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방바닥에 엎드려 감사 기도를 드렸다. “내 입에서는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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