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7일부터 군내 치안활동을 전개했던 울진경찰서는 각 지서별로 우익청년단체(대한청년단)와 이장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명단에 근거해 주민들을 체포, 검거하였다. 지서 경찰들은 마을 주민들을 소집해놓고 부역자를 지목하게 하여 연행하거나, 아예 마을 청․장년 남성을 모두 연행하기도 하였다. 지서 경찰은 연행 도중에 사살하기도 하였는데, 연행된 주민들을 지서, 면사무소 창고, 국민학교 건물 등에 갇혔다. 이들은 사찰계 형사들로부터 부역활동 가담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고 A, B, C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 B 등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는데, 이때 이송된 사람은 울진군 기성면 기성지서에서 40여 명, 근남면 근남지서에서 25명, 죽변지서에서 15명 정도 되었다. 나머지 C급 부역혐의자들은 3~7일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이들 중에는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귀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면소재지 각 지서에서 울진경찰서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은 울진읍내 울진국민학교, 남소학교, 울진경찰서 유치장 등에 각각 분리 수감되었다. 울진경찰로 이송되어 재조사를 받고 유치장에 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은 2~3일간 구금이 된 후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 집단 살해당했다. 신림 올시골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학살이 진행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된 사건현장은 게골 세 곳과 신림 작은판데기, 신림 큰판데기 등 모두 5곳이다. 당시 게골에는 40여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시신들이 널려 있어 밟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구덩이에는 여자들의 시신만 있었다. 여자들이 죽은 구덩이는 대개 산등성이 위쪽에 있었고, 남자들이 죽은 구덩이는 산등성이 아래쪽 골에 있었다. 신림 올시골에서 살해된 주민들의 수는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1956)에 “수복 후 시국을 불인식한 자 259명을 송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사건으로 25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울진의 주민들은 경찰 외에 헌병대 등 국군에 의해서도 희생되었다. 1950년 10월 20일, 울진면(현재 죽변면) 후정1리 부둘골에서 헌병대, CIC와 경찰에 의해 부역혐의자 약 40명이 총살되거나 생매장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50년 10월 8일부터 1950년 10월 19일까지 헌병대와 CIC 군인들은 우익단체와 이장들이 제공한 명단을 근거로 부역혐의자들을 직접 연행, 검거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을 죽변지서, 죽변국민학교, 후정1리 민가로 연행하였는데 도중에 사살하기도 하였다. 죽변에 주둔한 군인들은 연행한 100여 명의 주민들을 분류한 뒤 일부는 석방했으나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또다시 군인에게 인계되었다. 헌병대와 CIC는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경찰로부터 인계받았다.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무장한 보충대 군인들에게 인계된 주민들은 트럭에 실려 후정리 부둘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죽변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철수하고 난 후 후정리 부둘골 향나무 아래 구덩이에 30여 명의 희생자들이 사살당한 채 묻혀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1950년 10월 중순부터 온정지서 경찰은 30~40명의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여 온정면사무소에 구금하였다. 주민들은 이후 한 달간 온정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중 황진원 등 12명은, 1950년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에 의해 밧줄에 묶여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 문둥이골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1950년 11월 말경, 하당지서 경찰은 남왈수를 포함하여 5~6명의 주민을 끌고 가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총살했다.

기성지서 유치장에 구금된 주민들 중 일부는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나머지 안병위, 안두원 등은 1950년 11월 말경 트럭에 실려 가 후포항에서 배에 실려 수장되었다.

 

울진에서 국군 수복과 함께 희생된 주민들은 300여 명으로 보이는데 조사되지 않은 지역이 많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희생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