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경찰서 및 항남동 멸치창고 사건

 

1950년 8월 18일 통영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망일산 정상에 주둔하였고 국군은 견내량으로 상륙하여 정량동 독매산에 주둔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던 주민들은 인민군의 협박으로 쌀과 밥을 운반해야 했다. 1950년 8월 19일 국군이 통영을 탈환하자 인민군 점령 당시 인민군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통영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국군이 통영을 탈환한 후에도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인민군이 후퇴할 때까지 원문고개를 전선으로 긴장은 계속되었다.

 

1950년 8월 20일경 통영여자중학교 배속장교(계급은 소위)였다는 박숙경 등 주민들은 헌병대 문관 문창섭 등에게 잡혀가 통영경찰서 유치장과 헌병대가 사무실로 쓰고 있는 항남동 헌병대 멸치창고로 연행당했다. 고성군 하일면 자란도에서도 1950년 9월 11일경 통영으로 끌려 온 주민들이 있었다. 당시 동력선, 머구리배, 고기잡이배 등 5척이 정박하고 군인 수십 명이 배에서 내려 총을 쏘면서 마을주민들을 갯벌에 모이게 하였다. 군인들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번호를 부르게 한 후 남자들만 군함에 실어 잡아갔다. 그 뒤 나이가 어리거나 또는 많았던 주민들이 고성군 삼산면 와도에서 풀려났으며 윤형만, 이이숙, 이현식, 배종식, 박학봉 등 5명의 청년들은 통영으로 끌려갔다.

 

통영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1950년 8월 20일 태평동에서 연행된 나임숙(나임숙은 탁복수의 경우처럼 항남동 헌병대 창고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생존자이다)은 통영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조사를 받던 2일 동안 경찰들로부터 쇠파이프로 온 몸을 맞았으며 물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나임숙을 비롯한 구금자들은 5~6일 후 다시 항남동 멸치수산회사에 있던 헌병대 창고로 이송되었다. 통영경찰서 경찰관들은 당시 항남동 헌병대로 이송하면서 “푸른 동산에 가서 고이 잠들어라”며 조롱하였다. 나임숙은 인민군 점령당시 통영 시내에 있었다는 이유로 통영경찰서로 연행되었으며 고문을 당한 후 다시 헌병대가 주둔해 있던 항남동 멸치창고로 이송되어 3주간 갇혀 있었다. 나임숙은 감금되어 있던 3주 동안, 새벽 1시경 5명 또는 15명 정도의 주민들이 4~5회 불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태평동 안승관과 그의 부인 탁복수는 계엄사령관 박태진, 헌병대장 오덕선에게 직접 취조를 받았다. 연행된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던 헌병대 멸치창고에서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감금된 주민들을 창문으로 볼 수 있었다. 헌병 중 한 명은 최씨였다.

태평동 안승관은 1950년 8월 23일 그의 부인 탁복수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하였다. 탁복수는 그 뒤로도 20여 일 동안 고문을 당하다 풀려났으며, 풀려난 뒤 암매장 당한 남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였다. 수습 당시 시신에 총상은 없었다. 1960년 이양조의 증언에 따르면, 헌병들이 때려서 죽인 사람이 또 있었다. 어느 날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끌려 온 주민 한명이 헌병들에게 매를 맞은 후 멸치창고 안에서 사망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명정동 뒷산에서 있었던 총살은 공개처형이어서 많은 주민들이 직접 목격하였다. 주민들은 서병대, 조문주 등 항만동 멸치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중앙동 중앙시장을 한 바퀴 돈 후 명정동 충렬국민학교를 지나 절골 공동묘지에서 총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당시 3~4일 동안 매일 15~20명을 총살했다.

 

헌병대 문관들은 총살을 위해 명정동 뒷산 절골에 미리 구덩이를 파 놓았었다. 희생자들이 도착하자 일렬로 구덩이 앞에 세웠고 15미터 정도 떨어져 같은 수의 군인과 문관들이 총을 쐈으며, 확인사살까지 했다. 1950년 9월경 명정동 뒷산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50~70명에 이른다. "ㄷ“자 형의 멸치창고에는 서병대를 포함하여 70여 명의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당시 창고 벽 칠판에는 생선이 크게 그려져 있었으며, 그 위에 ”도마위에 놓인 고기떼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처형이 있는 날, 군인들이 새벽 1시경 ”기상“을 외치고 난 뒤, 명단을 보고 호명하여 나온 주민에게 멸치부대를 씌우고 ”이적“이라는 붉은 글씨를 붙인 채 손을 뒤로 묶고 데리고 나갔다. 나임숙은 ”처음에는 총살을 했으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깝다고 수장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남편 안승관이 의식을 잃은 채 실려나간 후로 20여 일간 항남동 헌병대 창고에 갇혀 있던 탁복수는 며칠에 한 번씩 갇혀 있던 주민을 새벽 1시에 깨워 둘씩 짝을 지어 30명 또는 36명씩 데리고 나가 바다에 수장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탁복수는 갇혀 있는 동안 목격한 희생자 수가 15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나임숙의 증언에 따르면, 추석무렵 진해 해군사령부에서 나와서 당시 창고에 남아 있던 15명 정도를 개별 면담하였으며 3~4일 뒤인 9월 30일경 석방하였다. 헌병대 수석문관 이양조는 진해 헌병대(대장 서소령)이 와서 문관들을 마구 때렸다고 증언하였다. 진해헌병대가 통영에 온 날은 1950년 9월 23일(음력 8월 12일)이었으며, 당시 멸치창고에서 생존한 사람으로 나임숙, 탁복수, 박숙자 외 13명 정도가 있었다.

 

광도면 안정리 사건

 

국군의 통영 수복 후 광도면 안정리 치안대는 인민군에게 밥을 해 주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의 가족들을 양조장으로 연행하여 고문하였다. 정창이는 1950년 9월 10일(음력 7월 28일) 인민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장용수 등 치안대에게 안정리 입구 다리 밑에서 타살 당했다. 같은 마을 주민 오요한도 당시 부역혐의를 받아 희생되었는데 구체적인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기부의 모친도 치안대사무실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치안대가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렸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도산면 사건

 

도산면 저산리 1구장(서촌) 정선화는 1950년 8월 20일경 저산리에 상륙한 국군의 배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바다에서 수장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2구장(동촌) 차용수도 함께 희생되었다. 정선화와 차용수가 국군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은 정선화의 며느리 이원두가 직접 목격하였는데, 이들 구장이 희생된 이유는 마을 대표로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 8월 20일경 국군은 통영읍내를 수복하였으나 통영지역 전체를 수복한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였다. 국군은 바다에 머물면서 마을에서 인기척만 보이면 총격을 가하였고 청년들이 보이기만 하면 모두 잡아갔다. 광도면 용호리 박철진은 통영해양대학교의 전신인 통영공립수산중학교 학생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원은 아니었다. 1950년 9월 8일 박철진은 “다른 곳에 숨어있으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일가 친척인 박선병과 함께 산에 있다가 국군에게 잡혀간 것이었다. 이끼섬 부근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사는 음력 7월 26일(1950년 9월 8일)에 지내고 있다. 도산면 법송리(법송리는 통영 광도면 용호리와 해협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어 육로로는 멀었지만 헤엄을 쳐서 건널 정도로 뱃길은 아주 가까웠다.) 박선병은 사건 당시 친척집안 일을 도와주고 있던 중, 위 박철진, 동생 박후병, 박도치와 함께 광도면 용호리 뒷산으로 가서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다. 얼마 후 산 정상에 있던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미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비행기는 박철진 일행을 인민군으로 알았는지 공격을 해 왔고, 네 청년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피신을 해야 했다. 전투가 끝난 후 박선병과 박철진이 광도면 용호리에 상륙한 국군에게 연행되었다. 이들이 연행되는 모습은 마을 주민 박봉갑이 숨어서 지켜보았다. 당시 배에서 내린 국군은 7~8명이었다. 박철진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의 부친이 위 옷을 벗어서 ‘살려 달라’는 뜻으로 흔들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배에 있던 군인들이 총을 쏘았다. 부친이 총상을 당하진 않았다. 당시 광도면 용호리에서 도산면 저산리까지 해군이 오르내리면서 바닷가에 보이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갔으며 저산리 구장 2명이 붙들려가 죽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당시 박선병, 박철진과 함께 끌려간 신원불상의 주민들이 7~8명 더 있었다.

 

도산지서 경찰관들은 1950년 8월 16일 후퇴하였으며 9월 23일 복귀하였다. 복귀한 경찰관들은 지서주임과 지서 소속 순경 나정숙, 이을수 등 5명이었는데 이들은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던 주민들을 지서 유치장으로 연행하여 취조하거나 감정적인 보복 행위를 자행하였다. 특히 이을수 순경은 복귀일인 9월 23일 도산면 법송리 주민 박성도가 부역했다는 이유로 그의 형이 살던 집을 태워 없앴으며, 9월 24일에는 도산면서기(총무계장)였던 조권환과 불심검문 당한 청년 2명(22세와 16세)을 연행하여 취조하였다. 국군이 통영을 수복하자 당시 면서기였던 조권한이 이들에게 협조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잠시 피신했으나 얼마 후 돌아와 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복귀한 도산지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당시 조권환이 연행되는 모습은 함께 면사무소에 산업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조명환이 목격하였다.

1950년 9월 24일 오후 4시경 조권환은 순경 나정숙으로부터 취조를 당했는데, 순경 나정숙은 “공무원으로서 부역행위를 했으니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를 들은 순경 이을수가 조권환를 지서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도산국민학교뒷산의 방공호(사격용 구덕)에 꿇어앉히고 그 뒤에서 휴대한 칼빈총으로 사살하였다. 이어서 오후 4시 20분경 이을수 순경은 같은 날 오전 9시경 도산지서 앞에서 연행하여 감금 중이던 성명불상 청년 2명을 끌고 나와 조권환을 살해한 같은 장소에서 또 총살하였다.(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단기 4284년 형공 제4호」판결문) 조권환의 시신은 수습되었는데 당시 함께 희생된 시신이 2구가 더 있었다. 이후 순경 이을수는 조권환 등이 총살당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이는 조권환의 형 조근명이 탄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1951년 11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이을수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도산면에서는 조권환이 희생당한 후인 1950년 10월 1일(음력 8월 20일)경에도 원산리에서 통영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여의치 골짜기에서 10여 명의 도산면 주민들이 총살당했는데 희생자들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가해자는 도산지서 소속 경찰인 것으로 추정된다.

 

용남면 장평리 사건

 

1950년 8월 18일 새벽 국군 해병대가 용남면 장평리 해안에 상륙하여 삼봉산 전투에 돌입하자, 장평리 김금례는 국군의 밥을 했으며 남편 박덕용은 노무자로 밥과 탄약을 나르게 되었다. 그 뒤 국군이 북진을 하였고 남편 박덕용은 이들과 같이 떠났다. 그러나 남아있던 김금례는 인민군에게 밥을 해 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1950년 8월 19일 CIC소속 군인에게 연행되었으며, 1950년 8월 20일경 새벽 용남면 장평리의 바다 건너편인 거제 사등면 덕호리 선창가로 끌려 가 총살당했다.

장평리 장봉립은 통영읍내인 정량동에 살고 있었는데 전쟁 발발 후 용남면 장평리로 피난하면서 정량동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1950년 8월 17일 인민군들이 통영을 점령한 후에도 정량동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CIC요원으로 추정되는 군인에게 알려져 잡혀가게 되었다. 당시 장봉립은 정량동에 다녀온 후 마을에 나갔다가 친구 김발식을 만났으며, 김발식이 “오늘 통영읍 공기가 어떠냐”라고 묻자, 장봉립은 “별 이상이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그 옆에 있던 삼베옷 차림의 사람이 이 대화를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CIC요원으로 밝혀진 이 사람에 의해 장봉립이 배에 태워 거제 견내량(거제 사등면 덕호리)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당시 군인들이 사용한 배는 용남면에서 어장을 하던 주민 김치진의 것으로 5톤 규모의 전마선(傳馬船)이었다. 시신은 거제 사등면에 살던 고모부가 발견하여 가족들에게 연락하였으며 그 후 화장하여 수습하였다. 장봉립은 인민군의 통영 점령 직후에 희생된 것이므로 1950년 8월 20일경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다른 마을 주민 7명이 함께 연행되어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