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수복 후 경찰이 젊은 사람들을 이웃 마을로 소개시켜 노인들만 남아있던 장평면 제산리 이목마을에 1950년 10월 26일 경찰토벌부대가 진입하였다. 경찰이 이목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자 들판에서 추수를 하고 있던 젊은 사람들이 놀라 마을로 돌아왔다. 경찰은 이들을 집결시킨 후 빨치산과 내통하기 위해 마을로 왔다면서 장도수 등 7명을 연행하여 그 중 6명을 마을 앞 냇가에서 사살하였다. 경찰에게 연행된 다른 주민 한명은 행방불명되었다.

 

다음 날인 1950년 10월 27일 장흥경찰서 소속 기동대 20~30명이 부용산자락 마을인 용산면 운주리에 진입하였다. 기동대는 2개조로 나누어 1개조는 마을 앞산을 수색하고, 또 다른 1개조는 마을의 집을 수색하였다. 경찰은 마을사람들을 마을 정자나무 아래로 집결시킨 후 마을사람 개개인을 조사한 후 이광준 등 7명의 양 손을 묶어 트럭에 싣고 가다가 용산면과 관산면 사이 솔티재에서 이중 5명을 학살했다.

 

1950년 11월 1일 경찰토벌대가 천태산 정상에서부터 대덕면 연정리 산정마을로 내려왔다.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면 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사람들은 무조건 피신을 했으나 박일규 등 3명이 수색 중인 경찰에게 붙잡혀 마을로 끌려왔다. 마을로 내려온 경찰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화장실에 숨어있던 주민 1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고, 마을에 숨어있던 주민들을 붙잡아 마을회관 앞으로 집결시켰다. 경찰은 마을사람 모두를 마을회관 앞으로 모이게 한 후 주민 2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산에서 잡힌 약산면 피난민 3명과 주민 4명을 마을 앞 대나무밭에서 사살했다.

 

1950년 11월 27일 경찰 토벌대가 다시 장평면에 진입하였다. 청용리에 경찰이 온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 젊은이들이 1km 떨어진 이웃 하동마을로 피신했다. 그러자 그날 밤 경찰 토벌대가 하동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청용마을에서 피신해 온 주민들과 하동마을 주민 등 7~8명이 사살되었다. 다음날 새벽 경찰 토벌대는 청용마을에 와서 마을주민들을 마을회관 앞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경찰 토벌대는 마을주민 한 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주민 4명을 연행했다. 경찰 토벌대는 이들을 연행하던 중 남자 1명을 마을 어귀에서, 또 다른 남자 1명을 생판리 고개에서 사살했다. 장평지서까지 끌려갔던 2명의 여성은 다음날 풀려났다.

 

국군 수복 당시 완도군 주민들은 ‘경찰이 수복할 경우 인민군 점령하 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모두 죽인다.’라는 소문을 들은 완도군 주민들은 일단 육지로 피하자는 생각으로 가장 가까이 깊은 계곡이 있던 장흥 유치면 보림사 계곡으로 피난하였다. 1951년 봄 경찰토벌대가 이 지역에서 작전을 하면서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을 학살했다. 보림사 계곡 동굴에 있던 피난민들은 토벌대가 난사한 총격에 집단희생 되었다. 이 사실은 현장에서 생존한 최남기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