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서는 1950년 7월 16일(갈매기섬 사건)과 7월 22일(화산면 해창리)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하며, 완도에서는 1950년 7월 17일(목포 인근 바다)과 1950년 7월 23일(완도 바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해남경찰은 1950년 7월 23일 부산방면으로 후퇴했으며 완도경찰은 7월 24일 금일읍 소랑도로 후퇴했다.

 

다음 날인 1950년 7월 25일 해남과 완도경찰이 후퇴한 사실과(이를 몰랐다면 인민군으로 위장한 나주부대 경찰과 해남 완도경찰 간의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므로) 수백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희생사실을 알고 있었을 나주경찰부대가 경찰신분을 숨긴 채 해남에 들어와 인민군 행세를 하며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전날까지 후퇴하던 경찰에게 가족들을 학살당한 유족들과 주민들이 반신반의하면서 소집되었다. 주민들 소집이 끝나자 변복한 경찰들이 신분을 밝히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해남에서는 이런 수법에 의해 1950년 7월 25일 해남읍 주민 40여 명이 학살당했으며 마산면 상등리에서도 15명의 주민이 학살당하는 등 모두 60여 명이 희생되었다.

 

완도에서는 마찬가지 수법에 의해 1950년 7월 25일 완도읍 죽청리 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1950년 7월 26일 완도중학교에 소집된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1950년 7월 27일 청산면 도청항과 청산국민학교에 모였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40여 명의 희생자 신분이 확인된다.

 

이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저질렀던 경찰이, 이에 대한 보복감을 갖고 있었을 주민과 유족을 의도적으로 선동하여 다시 한 번 학살하는 악마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