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지역에는 1950년 10월 20연대 3대대가 주둔하였으며, 1951년에는 20연대 1대대와 9연대 2대대도 주둔하였다.

 

1950년 10월 군인들이 춘양면 우봉리 마을에 들어와 마을 청년들을 능주지서로 끌고 갔다. 당시 능주지서에는 각 마을에서 끌려 온 주민들이 많았다. 1950년 10월 25일 일부 주민들이 능주지서 옆 능주역 인근에서 총살당했는데, 수 많은 희생자 중 홍태희 등 5명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1950년 11월 10일경 3대대 10중대가 동복면 천변리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마을에 진입하면서 총을 쏘았고 이로 인해 여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희생자가 누구인지 몇 명이나 되는 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동복국민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켰는데 이 중 3명이 사살당했다.

 

3대대 9중대는 1950년 11월 17일 저녁 모후산에서 내려오던 중 남면 다산리에 진입하여 일부는 청년들을 끌어냈고 일부는 주민들이 모여 있던 마을 회관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회관 안에 있던 주민들 상당수가 사망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주민들과 집에서 끌려나온 청년들이 마을 앞 논에서 다시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된 주민들은 30여 명에 달했다.

 

같은 군인들은 1950년 11월 19일 오전 10시 도암면 벽지리 봉동마을에 총을 쏘며 진입하였다. 총소리를 들은 주민들이 여기저기로 도망하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사살당하기도 했다. 집에 있던 주민들을 끌어 낸 군인들은 이웃 대곡리에서 피신한 주민들을 포함하여 15명을 마을 앞에서 총살했다. 사건 후 군인들은 생존 주민에게 부식으로 쓸 소를 몰게 하여 나주 다도면에서 1박을 한 후 광주로 복귀했다.

 

같은 날 3대대는 동면 마산리 인근에 있다가 총을 쏘면서 마을에 진입하였다. 이 모습을 목격한 주민들은 집으로 숨어들어갔으나 일부는 군인들에게 잡혀 마을 뒤편 논에서 총살당했다. 한편 다른 주민들은 집에서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이로 인해 주민 5명이 희생당했다.

 

한편 11월 20일 10시 3대대가 이서면 서리를 둘러싸고 기관총을 쏘며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집에 있는 사람들 중 20~40대 주민 12명을 끌어내 마을 밖에서 총살했다.

 

3대대 12중대는 1950년 12월 10일 북면 와천리에 진입하여 청장년 9명을 끌어내었다. 군인들은 외지에서 돌아오던 주민 1명을 마을에서 사살했으며 끌어 낸 주민 9명 중 6명을 난드리 고개 주막 마당에서 학살했다. 나머지 주민 3명은 주둔지인 이서면 월산리로 끌려 가 학살당했다. 이어 12중대는 1950년 12월 18일 북면 서유리 동유마을에서도 주민 2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12월 25일에는 북면 임곡리 임곡마을에 진입하여 100여 호의 집에 불을 질렀으며 산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이서면으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들 중 청년 3~4명을 마을에서 학살하고 떠났다.

 

1951년 2월 7일 3대대 9중대가 다시 남면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이 주산리에 들어오자 노약자를 제외한 주민들이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군인들은 도망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박격포를 쐈다. 총격과 포격을 피한 주민들이 이웃한 삼미마을로 가자 군인들은 다시 이들을 따라 갔다가 돌아와 마을에 불을 질렀다. 집 안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노인이 불에 타 죽었다. 이 공격으로 직접 피해를 당한 주민 7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그런데 희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밤에 잘 곳이 없어 개울가에서 밤을 샌 어린이가 얼어 죽는 일까지 있었으며 당시 공격을 피해 도망했던 주민 10명이 행방불명되었다.

 

1951년 3월 14일 새벽 국군 11사단 20연대 3대대와 9연대 2대대가 남면 유마리를 포위하며 마을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낸 후 마을 앞 논바닥에 두 줄로 세워놓고 기관총을 쏘았다. 이 사건으로 주민 12명이 희생당했는데 이 날 있었던 11사단 작전기록에는 56명을 사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51년 3월 17일 새벽 3대대가 도암면 도장리에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마을 안으로 먼저 박격포를 쏜 후 마을에 들어와 총을 쏘며 주민들을 불러냈다. 집에서 늦게 나오던 주민 2명이 집 앞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의해 사망했다.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모이게 한 군인들은 군경가족을 제외한 청장년을 분리하여 4열로 줄을 맞추어 서게 한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사건으로 모두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총상을 당했다. 학살을 마친 3대대는 도암면사무소 소재지인 원천리에 진입하여 마을 청년 5명을 끌어내 구타한 후 정천리 강산재로 끌고 가 1명을 총살했다.

 

3대대 11중대는 1951년 3월 23일 이미 한번 마을을 소각했던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에 진입하여 아직까지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 일부를 살해했으며 살아남은 주민들은 주둔지인 이서면 월산리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4명이 희생당했다. 당시 여성동맹위원장 등 끌려가면 죽임을 피할 수 없었던 처지의 주민들은 군인들이 진입할 때마다 산으로 피신했다가 군인들이 떠나면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같은 날 1대대가 북면 송단리 마을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을 밖으로 나오라고 한 후 총을 쏴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집을 빠져 나오던 주민들이 총탄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 군인들은 “데리고 나가 봐야 치료하려면 더 복잡하다”라고 하면서 현장에서 총을 쏘았다. 이 때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주민은 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