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에서 확인되는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진도경찰서, 고군지서, 군내지서, 임회지서에서 확인되었다.

 

진도경찰서

 

진도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11월 10일 벽파부두 부근에서 희생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군내면에서 양복점을 하던 분토리 박옥배 인데, 그는 용장리 인민재판에 참관했다는 혐의를 받아 진도경찰서에 감금된 후 희생당했다. 함께 희생된 다른 주민들에 대해서는 조사되지 않았다.

 

고군지서

 

고군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11월 지망리 절 골짜기와 의신면 창포리 하천가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희생사실은 오산리 조병하가 고군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일 2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지망리 절 골짜기에서 희생된 사실과 석현리 김영대가 4~5명의 주민들과 함께 1950년 11월 14일 창포리 하천가에서 총살당한 사실 때문에 알려졌다. 희생자 조병하는 독립운동가로서 1934년 진도적색농민조합 오산리 지구위원회 대표로 활동하면서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00일간 목포형무소에서 구류를 살기도 했다.

 

군내지서

 

군내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고문사당하거나 총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희생장소는 군내지서를 비롯해 송산리 잿등, 작두도 바다, 고작골 등이었다.
전쟁 전 군내면사무소 재무계장이었던 분토리 박운배가 군내지서에 갇혀 있다가 1950년 10월 14일 송산리 잿등에서 희생당했다. 10월 19일에는 지서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던 중 안인제가 사망했으며 안인제의 장인 박규홍은 11월 29일 군내지서 부근 고작골에서 총살당했다. 위 안인제와 박규홍은 전쟁 당시 후퇴하던 경찰에 의해 희생된 박병후의 가족들이다.
10월 21일에는 둔전리 이동률 등 30여 명의 주민들이 ‘조도호’에 실려 나간 후 작두도 바다에서 수장당했다. 희생자들이 희생당한 사실은 선원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동소포항에 징발한 배 ‘조도호’를 대기시키고 있었는데, 사건 당일 포승줄에 묶인 30여 명의 주민들을 배에 싣고 작두도와 저도 사이의 바다에 멈추게 했고, 선원들을 한 쪽으로 가라고 한 후 묶인 주민들을 뱃머리에서 떨어뜨리고 총을 쐈다.
이외에 당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는 군내면 주민들이 있었다. 군내면 세등리 곽재헌은 진도의 항일운동가 곽재술의 동생으로 곽재술이 월북하자 자주 경찰서로 연행되곤 했는데, 국군 수복 후 경찰에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곽재헌의 친척 곽재현은 국군 수복 후 고군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0월 24일 오산리 저수지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임회지서

 

수복이 되자 임회면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청년들이 임회지서로 연행되어 지서 옆 창고에 감금되었다. 당시 생존했던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창고에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밤마다 20여 명이 끌려 나가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자리 부근인 석교리 수장동 밭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로 확인된 주민은 임회면 연동리 박생배였는데, 그는 전쟁 전 총살당한 박월암의 동생으로, 국군 수복 후 인민군 점령기 자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1950년 11월 15일 희생되었다. 당시 지서에 감금되었던 100여 명의 주민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