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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 믿지 못해 소송 참여 못한 사람 많다" | ||||||||||||||||||||||||||||||||||||||||||||||||||
2008년 7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39명을 포함한 430여 명 이상의 강화지역 민간인들이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점령시기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강화경찰서등지로 연행·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집단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 같은 민간인학살은 강화군의 12개 면에서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이 민간인학살은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한국전쟁기간 중 북한점령시기의 '부역자'는 물론, '부역혐의자'와 그들의 가족이 북한 재점령 시 북한에 협력할 것이라고 예단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이다.
이 사건 희생자의 특징을 살펴보면, 신원이 확인된 139명 중 여성이 42명으로 전체의 30%이며, 10대 미만도 14명으로 전체의 10%다. 특히 삼산면 민간인학살사건의 경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17가족 53명이 학살되었다.
진실위는 강화(강화도·석모도·주문도)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주체로 '강화향토방위특공대'라고 확인했다. 이들은 경기도경찰국장의 부역자 처리와 관련된 지침에 따라 1951년 1·4후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화경찰서장과 청년방위군 강화지대장으로부터 가해관련지시와 함께 무기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경찰의 묵인·방조 하에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강화도민간인학살이다.
서영선(74) 시인은 당시 어머니와 1살 된 남동생, 그리고 77세의 할머니가 학살당했다. 그리고 그 후 그녀의 6살짜리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죽었고 어린 남동생은 경찰이 학교에 찾아온 후 귀가 도중 의문사당했다.
1살이나 6살짜리 아이들에게 정치적 이념이 있을까? 나는 진실위 근무 당시 서영선 시인의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녀의 자서전과 시집을 읽으며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외국 언론인들이나 해외에 나가서 진실위 활동에 대해 소개할 때 꼭 서영선 시인의 가족사를 이야기한다.
지난 7월 4일, 서영선 시인을 포함한 강화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진실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한 후 3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다음은 지난 7월 10일 서영선 시인과 서울시내 한 사무실에서 만나 나눈 일문일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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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간 맺힌 억울함이 돈으로 풀어지기야 할까"
- 진실위는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을 2009년 규명했고 강화본도(강화도·석모도·주문도)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은 2008년 규명했다. 4일 강화양민학살유족회는 강화민간인학살 관련소송을 법원에 접수했는데, 이번 소송에는 본도지역 희생자 유족만 참여했다. 이번에 함께 안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번에 두 소송을 다 진행하기에는 유족회에서 부담되는 면이 있다. 그래서 먼저 진실규명이 난 순서대로 이번에는 2008년 진실규명이 난 강화본도사건에 대해서만 소송을 진행한다. 2008년 진실위에서 강화본도지역 139명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났지만 그사이 연로한 유족들은 이미 돌아가셔서 이 세상에 안 계신 분들도 많다. 가슴이 아픈 일이다. 하여간 여건이 되는 대로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소송도 곧 시작할 예정이다."
- 이번 소송에, 생존해 계신 유족 전부가 참여하나? 소송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소송 내용은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배보상조치를 구하는 것이다, 물론 지난 60년간 유족들의 한 맺힌 억울함을 돈으로 보상한다고 해봐야 뼛속까지 깊이 묻힌 우리들의 상처와 한이 풀어지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국가가 우리 유족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배보상을 한다면, 그나마 억울한 우리 유족들에 대해 정부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 것이다. 또 그러한 정부의 의지가 각 언론에 보도된다면 국민정서가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있다."
- 서 시인 어머님도 1951년 강화도에서 우익단체에 의해서 무고하게 희생을 당하셨는데 당시 13세 소녀로서 겪은 상황을 기억나시는 대로 이야기해달라.
그때가 1951년 1·4후퇴 당시였다. 어머니는 1914년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오신, 당시로서는 인텔리였고 손재주도 좋으신 재원이었다. 그런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어느 날 강화경찰서로 끌려가셨다. 우리 어린 5남매(당시 4살, 6살, 9살, 13살, 15살) 아이들만 남겨놓고 어머니는 도망도 못 가시고 경찰서에서 온갖 야만적 고문을 당하셨다.
그때가 1월이었는데 엄동설한에 온기 하나 없는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의 나날을 보내셨을까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나는 당시 너무 어리고 무서워서 굶주린 어머니에게 밥 한 끼라도 해다 드릴 생각도 못했다. 또 추위에 떠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옷도 갖다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다. 아, 천추의 이 한을 어찌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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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로 어머니 잃고, 어린 동생도 영양실조로...
- 어머님이 희생되신 후 얼마 안 있다가 어린 동생도 영양실조로 생명을 잃었는데, 그때 상황을 이야기해달라.
내가 열다섯이었을 때 착하고 불쌍한 내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추석을 얼마 남겨 놓은 어느 날 나는 치마저고리를 지어 추석 날 입혀 준다고 하였지만 그 옷도 못 입어보고 그만 영양실조로 죽은 것이다. 그 한을… 그 슬픔을…. 나는 지금도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목이 메인다."
- 1951년 학살사건 이후 10대 소녀로서 동생들과 함께 이 거친 세상을 사시면서 갖은 수모와 고생을 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연좌제와 관련하여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달라.
방이라도 하나 얻어서 우리 어린아이들이 이사 가면 집주인에게 또 경찰이 찾아왔다. 그리고 뭐라고 경찰이 이야기하면 주인은 우리들에게 당장 이사 가라고 길거리로 내쫓았다. 그래서 우리 어린 것들은 한겨울에도 길거리로 내쫓겼다. 그뿐이 아니다. 남동생 학교에도 경찰이 찾아와서 선생과 학생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날 경찰이 학교에 찾아와서 뭐라고 한 날, 어린 남동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의문의 익사를 당했다.
그날이 1961년 6월 24일 토요일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박정희정권이 집권하고 한 달이 좀 지나서였다. 남동생이 학교에서 반공강연을 듣고 집에 오다가 그런 변을 당한 것이다. 아, 그 고통과 한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나! 경찰들은 거의 매일 집에 찾아오고 너희들은 그저 죽으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꿋꿋이 살았다."
- 사건 진실규명이 2008년에 됐는데 지금에야 소송을 하게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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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한을 지면에 풀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인이 됐다"
- 한스러운 삶을 살아 오시면서도 한국펜클럽회원으로서 시집도 내고 자서전도 출판하셨는데,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하신 비결은 무엇인지?
그 후 시집 3권과 자서전도 출판하고 동인들과 함께 동인시집 12권도 출판했다. 어려움을 극복한 비결은 끊임없는 집념과 고집이었다. 훌륭하신 부모님들이 하늘나라에서 나를 항상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내가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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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회 활동을 하시면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과 애로사항은 무엇이었나?
- 과거사정리와 관련하여 대통령, 국회, 사법부에 드리고 싶은 고언이 있나?
- 과거사 정리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특별히 젊은 세대들을 위해 한 말씀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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