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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묻힌 과거 인권침해 사건, 국가 상설기구서 다뤄야

                                   한겨레/ 등록 : 2012.09.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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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2월 서울 종로구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이 제를 올리고 있다. 수많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활동했지만, 조사 권한과 활동기간의 제약으로 아직까지 많은 과거사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역사정책 미래를 열자
③ 과거사 청산 멈출 수 없다

장준하 선생 37주기를 맞아 타살 의혹이 재점화된 것과 관련해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현장 목격자 등에 대한 조사가 그간 이뤄지지 않았나?”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같은 당의 정의화 의원은 13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법의학자의 유골 검사 결과, 새로운 증거가 나왔으니 재규명 조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정부에 재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실 의문사위 조사 당시 기무사령부는 조사 때마다 ‘존안자료 없음’이라고 답변했다. 당시 조사관들은 국정원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끝내 협조받지 못한 존안 문서의 확보와 더불어 유골 감정을 과제로 남기고자 일단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게 됐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 선생의 유골에서 그 의혹이 분명하게 드러난 지금, 이 사건의 전면 재조사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수많은 진상규명 위원회들
보수세력 방해로 권한 제한
‘미제’ 인권침해 사건 수두룩
“과거사 청산이 곧 국민통합”

1990년대 광주 5·18 사건 재판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설치됐고, 과거 은폐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많은 진상조사도 이루어졌지만, 왜 아직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것일까?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고, 그 결정에 따라 과거 간첩조작 사건,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 등의 피해자들이 법원의 재심 결정과 보상 조처로 약간의 명예회복을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사 권한과 활동기간의 제약으로 많은 인권침해 사건이 미결과제로 남았고, 신청기간의 제한으로 한국전쟁 피학살 유족들은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과거사 재단 설립, 보상·배상 관련 특별법과 유해발굴과 영구 안치시설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 등도 권고됐으나,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정부의 정책이 없는 가운데 법원은 건건별 판결을 내리고 있어 형평성의 문제도 심각하다.

2004년 8월,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포괄적 과거청산 필요성이 제기되고 과거의 인권침해사건 조사특위 구성이 거론되자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친북좌익 행위도 조사하자”고 맞불을 놓아 과거사법은 누더기법이 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도 과거 인권침해를 조사하는 기구로서의 성격이 현저히 퇴색되고 말았다. 많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활동했는데도 이렇게 남은 과제가 많은 이유는 지금까지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새누리당이 과거 공권력의 잘못을 밝히려는 작업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 문제를 좌우 구도로 몰아가거나 조사권한을 극도로 제한하고 최소한의 민원처리만 담당하는 기구로 변질시킴으로써, 가해자의 처벌과 진상조사 결과의 완전한 공개를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이 위원회 활동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그 성과를 묵살했다. 그래서 국민들도 이 위원회들이 무슨 진실을 새롭게 밝혔는지 거의 알지 못한 채, 억울한 피해자들의 한풀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 들어서 공안기관의 탈법, 검찰의 정치화, 민간인 사찰 등의 구대시적인 행태가 재발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책임자들을 비롯해 유신시절 이후 인권침해를 자행했던 국정원·기무사·검찰·경찰 조직의 주역들이 여전히 이 사회의 정치·사법·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한 과거 청산이 순조롭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사안이 단순히 과거를 다시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인권침해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진정한 국민통합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더 많은 국민들이 자각하기만 하면 문제는 쉬워진다.

“아직도 더 조사할 게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실 온 국민이 모두 알고 있는 광주 5·18 사건 피해 실태조사도 제대로 된 적이 없고, 가해자 규명도 되지 않았다고 답변할 수 있다. 그리고 항쟁의 주역들과 그 가족들은 여전히 생활고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가해자들은 천수를 누리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규모가 적어도 좋으니 정부나 국회에 민간 참여의 상설 과거사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기구는 미진한 조사 작업을 계속하고, 피해자 명예회복 등의 후속사업을 관장하는 일을 해야 한다. 가해자의 범법사실이 확인되면 응분의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억울하게 평생을 살아온 국민들을 달래고, 사회통합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과거 청산을 가장 모범적으로 한 국가에 속한다. 그 성과를 발로 내차지 말고 잘 마무리해서 아시아의 독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한국은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는 일본에 대해 큰소리로 야단칠 수 있고, 장차 아시아 인권국가로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춘/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