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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북면 석봉리 속칭 '석달동'에서는 62년 전 억울하게 희생돼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을 위로하는 추모 제례가, 24일 새동아가든에서 이시하 경북도의원과 생존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 되었다.
석달동 양민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24일 국군 2개 소대 병력이,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서 주민 100여명을 모아놓고 공산주의자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총격을 가해,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 86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사건이다.
이후 무장공비에 의한 학살극으로 위장됐지만,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한 데 분노한 국군이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주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령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국군에게 억울하게 학살당한 어린이 32명 등 무고한 양민 86위 영령들을 위무하고 애도하기 위해, 19년동안 치러지고 있다.
추모제를 주관하는 석달동 양민학살 참살자 위령사업 추진위원회 채의진(74) 상임대표는, "위령사업 추진과 법적싸움 등 많은 일들과 위기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위령들이 도와주어 여기까지 왔다." 며, "우여곡절끝에 정부로 부터 보상의 길이 열렸지만 아직 갈길이 멀기만 하다." 며 인사말을 통해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오랜세월 자신의 전부를 걸어 석달동 양민집단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보상에 관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피해자 유족인 채의진씨 등 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지난 9월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민간인 학살 등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피해자에 대해서는 통상의 시효가 지났어도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작성일시 - 2011-12-24 오후 1:29:04 / 문경신문 |
<참고> 석달동 양민학살사건이란?
석달동 양민학살 개요
1949년 12월 24일(음력11월5일) 정오경 24가구에 127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경상북도 문경군 석달동에 국군 제3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의 2개 소대장병 69명이 느닷없이 마을에 닥쳐 주택 24가구 전체를 불 태우고 마을주민 전체를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놓고 바주카포.수류탄.소총으로 사람들을 표적삼아 마치 사격연습을 하듯 마구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마을 뒤 산 모퉁이에서 학살당한 주민들은, 산넘어 석봉리 동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던 청장년들과 학교에서 하교하던 어린 초등학생들 이었습니다.
불과 한두시간 동안에 마을의 집들은 모두 불탓고, 마을 주민 8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일부 생존자들 중 중상자 10여명 중에 2명은 이날 날이 어둡기 전에 그리고 2명은 자정 이전에 사망했고, 1명은 입원가료 중
사망하여 이 날 국군들의 만행으로 학살된 마을 주민은 모두 86명 이였습니다.
다음 날 현장에는 형체를 알아볼수 없도록 시체가 모두 불에 타 검은 숯이 되어 있었다
*채의진 선생은 사건당시 13살 어린나이로 형과 사촌동생 시체밑에 깔려 구사잃생 살아나 사건일체 를 낱낱히 정확하게 보아 알고 있으며 그날 아홉식구를 하루에 잃은 분입니다.
이유는 국군이 왔는데도 반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트집잡아 마을 주민 모두를 빨갱이로 몰아서 행한 어처구니 없는 행동 이였습니다. 국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영토를 지켜야할 의무를 가진자들 입니다. 이들은 처벌과 책임이 마땅하거늘 아무런 처벌도 받은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요인은 미국전범들의 보호와 합작이였습니다. 배후는 미국이었고 행동은 이승만 독재 정부였습니다.
문경 석달동 양민 집단학살 참살자 유족 대표 채의진 선생의 노력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맥아더기념관에서 기밀문서로 지정되었다가 해제된 미극동군 사령부 문건에서 석달동 양민 학살전모를 찾아내어 그 자료를 복사하여 국내 언론에 폭로하고 국회와 정부에도 제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