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정륙 전시 납북국회의원 유족회장

13.06.19 14:51l최종 업데이트 13.06.19 18:02l   김도균(capa1954)btn_arw2.gif    유성호(hoyah35)btn_arw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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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김상덕 제헌국회의원의 장남인 김정륙 전시납북국회의원유족회 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지난 2006년 10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힌 선친의 묘소를 누이와 함께 찾아 참배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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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고영구 부장판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구중회 전 의원 등 제헌국회의원(아래 제헌의원) 12명의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으로 몸을 피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27일 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군이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들은 안심하라"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다. 또 국군은 다음날 새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해버려 제헌의원들을 비롯한 서울시민들의 피란길을 막아버렸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 기간 동안 제헌의회 의원 34명과 제2대 국회의원 27명 등 총 61명의 국회의원들이 납북됐으며, 휴전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지난 2011년 납북 제헌의원 12명의 유가족들은 이런 이유를 들어 "제헌의원들이 납북된 것은 정부의 잘못 때문"이라며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한국전쟁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 위법 아니다"

한강다리 폭파와 납북국회의원
1950년 6월 19일 구성된 제2대 국회는 원(院)구성 6일 만에 한국전쟁을 맞는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6월 26일 새벽, 국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전(全)국무위원이 출석한 가운데 사태수습을 논의했으나, 정부 당국자조차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산회했다.

다음 날인 27일 새벽, 국회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을 출석시킨 가운데 다시 회의를 열고 사태진상을 보고받은 후 대책을 추궁했으나 명확한 답변은 듣지 못했다. 이날 국회는 원세훈 의원의 긴급동의로 '수도 사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봉암 국회부의장이 국회의 결정사항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러 경무대로 갔지만 이미 이 대통령은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을 떠난 뒤였다.

국군은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오전 2시 30분께 아무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 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사무처는 국회가 수도사수 결의를 했기 때문에 의원들에게 피란 통고를 하지 않았다. 이후 의원들은 개인적인 판단 하에 서울을 떠났고 그 때문에 미처 피란을 못한 국회의원들이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정부와 국군, 의회가 서울 사수에 대해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며 "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 해도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한강인도교 폭파 전날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신한 상황에서 서울 시민들에게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 것에 대해서도 "시민들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봤다.

납북 제헌의원 유가족들은 1심판결에 불복, 항소장을 제출했다. 지난 17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전시납북국회의원유족회 김정륙 회장(78·김상덕 제헌의원 장남)과 김흥수 부회장(65·김영동 제헌의원 장남·목사)은 "'제헌의원들의 납북과 한강교 폭파가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법원 결정에 승복할 수 없다"고 항소 이유를 밝혔다. 또 유가족들은 "북한의 남한 내 유력인사에 대한 납치·납북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오히려 정부가 거짓방송 등으로 이들을 속여 납북되게 한 것은 자국민 보호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성토했다.

다음은 김정륙 회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선친 김상덕(1891~1956) 제헌의원은 상해 임시정부의 문화부장(문화부 장관)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아 친일세력 청산에 힘을 썼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납북 경위를 설명해 달라.
"당시 나는 경신중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중구 필동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을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 하고 있었는데, 6월 27일 밤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에 나와 '국군이 반격 중이니 도망가지 말라, 나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마라'고 했다. 그 방송을 집에 있는 라디오로 아버지와 함께 똑똑히 들었다. 당시에는 그게 생방송인 줄 알았지, 녹음방송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대통령 자신은 이미 대전으로 피신을 한 상태에서 이걸 녹음을 해서 틀게 한 것이었다.

대전에서 녹음된 이승만 대통령 방송

(기자 주 :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 방송 당시 KBS 서울본사 숙직 근무자였던 박아무개씨는 지난 3월 14일 열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1950년 6월 27일 저녁 무렵 KBS 대전방송국에 근무하던 유아무개로부터 전국방송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는데, '중요한 방송이니 오후 9시 시보가 나가면 대전방송 쪽으로 키를 넘기라고 하면서 방송시간을 잡아달라고 하였는데 방송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나와 시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박씨는 '유아무개씨가 1950년 6월 27일 오후 7시께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 권총을 빼든 군인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고, 군인들에 의해 충남지사 관사로 끌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를 대면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관사에서 방송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방송시간은 27일 오후 9시부터, 대전에서 방송하는 것임을 숨길 것, 방송내용과 방송인을 사전에 밝히지 말 것, 전국으로 방송할 것, 서울에서 녹음 재방송이 가능하도록 할 것 등을 지시받았다고 하지요'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예"라고 답변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이 없었다면 납북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28일 새벽 한강인도교가 폭파되고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아버지는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다. 아버지는 돈암동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을 하시고 나는 의용군으로 끌려 갈까봐 꼼짝 않고 숨어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가지 못했던 지방출신 학생들이 하숙집에서 쫓겨나자 끼니라도 해결하려고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젊은 청년들이 여러 명 들락날락 하는 것이 북한 내무서(경찰)의 주목을 쓸었던 것 같다.

열흘쯤 지나자 내무서원들이 집에 들이닥치더니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것에 차압 딱지를 붙였다. 그 와중에 응접실 의자 밑에서 권총이 한 자루 툭 떨어졌다. 전쟁이 터지기 전 우리집에는 반민특위 조사관을 했던 심륜씨 부부가 같이 살았는데,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이 분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헌병 장교가 됐다. 그리고 권총 오발 사고로 손바닥에 총상을 입고 붕대를 삼고 출퇴근을 하던 차에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다. 헌병 장교에다 총상을 입었으니 인민군에게 잡히면 그냥 즉결처분될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이 분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강다리가 끊기고 난 뒤에 집에 쫓아 들어오더니 부인을 데리고 허겁지겁 피신을 하는데, 내가 걱정이 돼서 권총 행방을 물어보니까 감쪽같이 숨겨놨으니 염려 말라고 했는데, 그 권총이 의자 밑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나와 당시 집에 같이 살고 있었던 고려대 학생 천금준형과 같이 필동 내무서에 연행돼 열흘 동안 고초를 겪었다. 권총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반민특위 위원장 시절 경호관이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미리 말을 맞춰뒀던 데다가 우리 신분이 중학생과 대학생들이니 결국 방면돼 풀려나왔는데, 집에 오자마자 내가 그만 의식을 잃고 까무라쳐 버렸다. 근데 그 얘기를 누나가 아버지에게 해버렸던 거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마흔 넘어 하나 얻은 아들이 나였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셨겠는가. 밤새 고민 고민 하시다 다음날 집에 나타나셨는데, 내가 너무 놀라서 앓는 중에도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황급히 바깥으로 밀어 냈다. 아버지가 대문 밖을 나서는데 검은 지프 한 대가 나타나더니 정치보위부 군인 둘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남반부에서 훌륭한 일을 하신 걸 잘 안다, 잠시만 모시겠다'고 차에 태웠는데, '걱정하지 말라'며 차에 오르시던 모습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납북, 아들은 '연좌제'에 고통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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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김상덕 제헌국회의원의 장남인 김정륙 전시납북국회의원유족회 회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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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 선생이 납북된 후에는 연좌제에 묶여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도 영양실조로 죽었다. 이제 아버지까지 납북되시니 두 살 위 누나와 나만 남게 됐다. 중학교 3학년생이 무슨 생활 능력이 있었겠는가. 어찌하다 누나와도 헤어져서 아버지 고향인 경북 고령, 외가가 있던 경남 합천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독립운동하실 때 의형제의 연을 맺었던 은인의 도움으로 경남 삼천포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는데, 당시는 취직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신원증명서를 첨부해야만 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나는 신원증명서가 발급이 되지 않았다. 당시 어렵게 내 호적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 빨간 줄이 가 있었다. 아버지가 납북 당하실 때 경신중학교 교장이셨고 학교 재단이사장은 독립운동시절부터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셨는데, 마음만 먹으면 학교 수위 한 자리를 못 얻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취직서류의 제1조건인 신원증명서를 얻을 수 없었고, 그 뒤로는 취직에 대한 희망을 접고 막노동·신문 보급소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기자 주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자신의 저서 <김상덕 평전>에서 "김정륙이 누군가. 이역만리 망명지의 고아원에 맡겨져 자란, 항일독립지사 김상덕의 아들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부친의 전력은 종적을 감추고, 그저 '납북자의 아들'이라는 신원증명만 남아 취업의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1950~60년대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체제에서는 원인 불문하고 가족(심지어는 사돈네 팔촌까지)이 북한에 있다면, 그 연관된 이들에게는 붉은 딱지가 붙게 되고 공직 진출은 물론 사기업의 취직도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지난 1990년 정부가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아버지 서훈을 계기로 호적을 떼어 봤는데, 그때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분명히 호적에 빨간 줄이 가 있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었는데, 빨간 줄은 온데간데 없고 어머니 이름만 곧을 정(貞) 자를 순할 순(順) 자로 잘못 적어놨더라. 아버지 고향까지 가서 원적까지 확인해봤는데도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정말 연좌제가 유령 같은 법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연좌제를 폐지한 이후 아무런 법적인 근거도 없고 명시적인 법조문도 없이 수십 년 동안 나를 이렇게 옭죄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말 허탈했다.

"연좌제 증거 없다고 구체적 피해 입증하라니..."

정부가 1990년에 아버지에게 서훈하고 나서도 2011년 8월 납북피해자로 공식 인정할 때까지 아버지에게는 '월북 좌익'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분명히 북한에 강제로 잡혀갔음에도 과거 정부로부터 이적행위자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재판부는 연좌제로 피해를 입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며 유가족들에게 연좌제 피해를 입증하라고 하는데, 이것을 개인이 무슨 수로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또 납북된 국회의원들의 체북행적을 문제 삼아 명예 회복에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문제가 있다면 정부가 입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는 1969년 제헌의원들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지만, 수여 대상에서 납북된 대부분의 의원들을 제외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꼭 되찾아 드리고 싶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독립운동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납북돼 북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으셨을 아버지, 영양실조로 죽은 동생과 평생을 가난 속에 힘들게 살다가 8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집사람을 위로 할 수 있도록 작은 동산을 하나 만들고 싶다. 우리 집 가화(家花)가 진달래인데 그 동산에 진달래를 심어 그 넋이라도 위로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