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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7 07:48:30 (*.96.1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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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10-06 18:30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생뚱맞은 발언이 점입가경이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더니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또 사법부·검찰·공무원 중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단다. 황당하지만, 공안검사 출신인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건 놀랍지 않은 일이다.

검찰 출입기자이던 20여년 전 한 공안검사는 기자에게 “한완상은 간첩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당시 부총리이자 통일원 장관을 가리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간첩’이라고 했다. 근거는 대지 않았다. ‘확신한다’고만 했다. 간첩이라는 근거가 있다면 수사를 해야 하고, 근거가 없다면 그런 확신을 가져선 안 되는 게 상식이다. 그렇게 상식을 전복한 채 머릿속에서 수많은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상상’해내는 게 낡은 공안검사 특유의 야릇한 정신세계다. 고 이사장은 이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공안적 사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실체적 진실을 경시한다는 점이다. 현실이 확신과 들어맞지 않으면 확신을 수정하는 대신 현실을 비틀어버리곤 한다. 사실을 조작하는 것이다. 고 이사장이 수사했던 ‘부림 사건’이 그런 예다.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학생·회사원 등 22명을 영장도 없이 연행해 고문한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밖에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의 간첩·시국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조작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유우성씨 간첩 조작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견강부회가 뒤따른다. 부림 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고 이사장은 “사법부 일부가 좌경화됐다”고 했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는데, 그럼 대법관들도 좌경화됐다는 말인가? 근거는 무엇인가? 그 스스로 법원을 능멸해 놓고, 문재인 대표가 한명숙 전 의원에 대한 법원 판결을 비판한 것을 두고선 “사법부를 부정했다”고 공격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 아니고, 이를 잘못했다고 하는 법원은 나쁜 법원인데, 다른 사람이 그 법원을 나쁘다고 하는 건 또 잘못된 것이고…. 이렇게 편하게 세상을 재단하는 법이 또 있을까? 사실과 논리를 버리고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뒤섞으면 그렇게 편하게 살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사실도 논리도 필요 없이 그저 공산주의·좌경이라는 낙인만 찍으면 게임이 끝나던 독재시대를 거치며 생긴 버릇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라는 착각도 그 시대를 거치며 굳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좌든 우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굴레를 씌워 침묵시키거나 처벌하는 전체주의적 광기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이를테면 부림 사건 같은 게 자유민주주의를 쓰러뜨린 칼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 국무부가 해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는 인권보고서를 내는 것도 그래서다.

고영주 이사장은 아직도 그 과거에 붙박여 있는 듯하다. 국민은 무지하니 ‘공산주의자 감별 전문가’인 자신이 누구든 지목하면 그런 줄 알라고 강변한다. 흘러간 공안검사의 한갓 공상에 나라를 맡기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국민이고 민주주의고 대놓고 부정하는 망상 수준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그렇다고 그의 입을 막을 필요는 없다. 검찰 요직을 거쳐 공영방송 감독기구의 이사장으로 발탁된 사람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낡은 공안세력과 그들을 중용하는 집권세력의 본질을 명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 같지 않은 말에도 이렇게 일말의 가치는 담겨 있는 법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의 적에게까지도 표현의 자유를 허용한다. 고 이사장의 말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으로서 자격 미달을 증명한다면 그를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 책임지게 하면 된다. 그러니 그로 하여금 마음껏 떠들게 놔두자.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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