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19 20:37수정 : 2015.03.19 20:42


1921년 겨울 상하이의 한국유학생 모임인 화동학생연합회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맨 앞줄 가운데 보타이를 맨 청년이 박헌영, 둘째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일본 여학생 교복을 입은 여성이 현앨리스다. 돌베개 제공

냉전의 마찰면에서 산산조각난 한 가족의 초상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돌베개·2만원


한 시대를 통과한 사람의 몸과 영혼에는 그 시대의 흔적이 인장처럼 새겨진다. 격동의 시대일수록 흔적은 난폭해진다. 일제 침략과 분단이라는 잔혹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 땅에서 무자비한 시대의 폭력을 비켜간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마는, 현앨리스와 그의 가족의 운명은 너무도 기구해서 한 역사학자의 호기심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는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오랜 추적의 산물”이다.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성장을 한 젊은 청년 19명이 함께 찍은 옛날 사진. 시선은 맨 앞줄 가운데 보타이를 맨 채 옆 사람들에게 팔 하나씩을 걸치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사내에게 집중된다. 박헌영(1900~1955)이다. 사진만으로 그가 이 모임의 중심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옷을 입은 여성들 사이에서 일본 여학생 교복(일명 세라복) 차림의 앳된 얼굴이 눈에 띈다. 이 여성이 현앨리스(1903~1956?)다. 앞줄 맨 오른쪽 가장 어린 나이로 짐작되는 홍안의 소년이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이며, 현앨리스 오른쪽이 장차 박헌영의 부인이 되는 주세죽(1901~?)이다. 이 사진은 1921년 겨울 상하이의 한국유학생 모임인 화동학생연합회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이 사진 속 인연이 30여년 뒤 자신들의 목숨을 삼키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에선 박헌영의 첫 애인으로
남에선 마타하리로 불리는 현앨리스
그는 애인도 마타하리도 아니라
냉전의 희생양이었다
해방조국을 꿈꾸다
갈가리 찢긴 가족 이야기


현앨리스의 한국 이름은 현미옥. 아버지 현순(1880~1968)은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한 뒤 노동이민의 통역으로 미국 하와이로 떠나 호놀룰루와 카우아이섬에서 목사로 활동한다. 현씨 가족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1919년 3·1운동이었다. 민족주의자였던 현순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열기로 달아오르던 상하이로 향한다. 여기서 현순은 아들 뻘이지만 유학생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박헌영을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박헌영과 현앨리스, 현피터 사이에 교분이 생기게 된다. 현순은 여운형이 지도자로 있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소속이었다.


당시 상하이 동포 사회는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사회주의 훈풍이 지배했다. 1917년 혁명 이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이 된 러시아는 조국을 잃은 조선인들에게 물심양면으로 기댈 언덕이 되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 빨려들어간 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이 의사가 되기 위해 체코로 떠나기 전 촬영한 가족 사진. 가운데 넥타이 맨 이가 아버지 현순, 그 왼쪽 옆이 현앨리스, 오른쪽 끝 흰 티셔츠를 입은 청년이 정웰링턴이다. 돌베개 제공


지은이가 현앨리스의 인생을 추적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박헌영과 관련이 있다. 알다시피 북한은 1955년 당시 부수상 겸 외상이었던 박헌영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및 ‘공화국 전복’ 혐의로 처형했는데, 이 때 현앨리스가 간첩활동의 매개자이자 인적 증거로 등장한다. 북한의 박헌영 기소장에는 현앨리스가 “1920년 상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었으며 미국의 스파이로서 박헌영의 도움으로 북한에 입국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나온다. 2000년대 들어 일부 한국 언론은 현앨리스를 ‘한국판 마타하리’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은이가 관련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결과, 현앨리스는 박헌영의 애인이 아니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사이에 서로 호감이 있었을 수는 있으나 앞의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둘의 간첩 활동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지은이는 결론 내린다. 북한이 현앨리스를 간첩이라고 지목하는 결정적 대목은 현앨리스가 미국 국적자로서 주한미군에 복무했다는 것이다. 현앨리스가 미군정 당시 남한에서 미군 군속으로 근무한 것은 맞다. 주한미24군단 정보참모부 산하 민간통신검열단(CCIG-K)의 부책임자였다. 동생 현피터 역시 24군단 소속 한국인 통역으로서 대위 또는 소령 대우를 받는 군속이었다. 이들은 박헌영과 여운형을 만나는 등 거침없는 행보로 미군 방첩대(CIC)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결국 현앨리스는 “CCIG-K의 임무를 파괴”한 “악마”라는 비난을 받으며 미국으로 추방됐고,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던 현피터 역시 추방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앨리스가 주한미군 내의 공산주의자들과 박헌영의 만남을 주선했고, 이들을 통해 미국 공산당과 남로당 사이에 연결 통로가 생길 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의 서신을 갖고 출국하던 주한미군 공산주의자 로버트 클론스키가 인천항에서 체포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추방된 클론스키는 <피플스 데일리 월드>와의 인터뷰(1946년 5월13일)에서 “(남한에서) 언론에 대한 탄압과 테러공격 등을 직접 목격했으며, 남한에는 언론 자유가 없고, 미군정은 불리한 정보가 남한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역시 주한미군이었던 데이비드 옴스테드는 한국에서 추방된 뒤 한인 좌파들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하던 <독립>에 미군정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미군정·미군들이 한국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멸시”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독립>은 미국으로 추방된 현앨리스 남매가 활동을 개시한 주요 무대였다. 북한의 의심보다는 미국의 의심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정웰링턴을 안은 젊은 시절의 현앨리스. 돌베개 제공


1949년 현앨리스는 가족을 남겨두고 ‘사상의 고향’ 북한에 들어갔다가 1955년 박헌영 사건에 연루된다. 그러나 하루 만에 끝나버린 박헌영 재판에서 핵심 증인인 현앨리스는 소환조차 되지 않았다. 어떻게 처형됐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졌다. 현앨리스의 두 동생 현피터와 현데이비드가 공산주의자이자 소련·중국의 첩자라는 혐의로 ‘비미(Un-American)활동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둘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추방 위협을 받았다.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 또한 1963년 체코에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 역시 북한 입국을 희망했지만, 북한은 간첩 혐의자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역시 외삼촌들의 간첩 혐의와 관련해 웰링턴의 소재 등을 체코 정부에 문의했다. 체코 정부는 웰링턴의 서신을 가로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약점이 잡힌 그는 체코 비밀경찰에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자녀와 부인을 남겨두고 자살을 택했다. 온 가족이 지구의 어디에도 발 붙이기 어려운 신세가 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경로는 그녀의 한 몸에 다중적이고 역설적인 정체성을 강요했다. 현앨리스를 투과한 근현대의 빛은 공존 불가능한 극단적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 남한과 북한, 미국과 일본, 나아가 체코에 도달해 그 삶의 편린들을 모은 후에야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한국 현대사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한 여성의 치열했던 삶을 스파이의 우극(愚劇)으로 마멸시켰지만, 미래 한국은 묘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좀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