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19 20:51수정 : 2015.01.20 08:58

철거민 23가구 전수 조사

용산 참사 6주기를 하루 앞둔 19일 오후 참사 현장이던 남일당 건물과 주변 건물은 모두 철거돼 빈터만 남아 있다. 2009년 1월20일 아침 경찰이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재개발 사업에 반대하며 농성하던 주민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지는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쫓겨난 이들의 삶은 ‘강등’돼 있었다.


시계방·식당·당구장·중국집·피시방 등을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듣던 23명 가운데 10명은 작은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하거나 계약직 판매원, 경비원, 식당 종업원, 배달원이 됐다. 아예 직장이 없는 이도 7명이나 됐다. 건강이 노동을 허락하지 않는 이도 많았다. 6명은 점포를 새로 열었지만, 생활은 6년 전보다 어려워졌다. 자기 집에 살던 이는 전세나 월세, 임대주택으로 한 계단 또는 몇 계단씩 내려앉았다. 지상에서 살던 사람도 반지하로 내려갔다. 가족과 함께 살던 이들 가운데는 뿔뿔이 흩어져 홀로 사는 이도 있었다.


2009년 1월20일 아침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재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졌다. 용산 참사 6년을 맞아 <한겨레>는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으로 당시 마지막까지 남일당 건물에 남았던 철거민 23가구의 삶을 전수조사 형태로 추적해 봤다.(<표> 참조)



자기 가게 운영했던 23명 중 10명
식당종업원이나 배달원 등으로
7명은 아예 직장조차 없어
자기집 살던 이는 전세·월세로
함께 살던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진상규명위 “시, 이제라도 대안을”
시 “재개발 진행 말곤 방법 없어”


■ 사장님에서 계약직으로

김재호(59)씨는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경비원으로 일한다. 그는 1984년부터 용산에서 시계점 ‘진보당’을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 참사 뒤 감옥살이를 한 그는 2012년 10월26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경비 일은 지난해 8월에 시작했다. “별 볼 일 없어도 가장인데 집에 처박혀 놀 수 없었다”고 했다. 진보당을 운영할 때는 매달 순수익이 300만원은 됐다. 지금은 월급 120만~130만원을 받는다. “나이가 있어서 할 수 있는 일도 경비 일 정도”라고 했다. 평생을 주부로 살았던 아내는 그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생계를 위해 노래방을 시작했다.


커피숍 ‘샤뜰레’의 주인이던 박창숙(55)씨는 지난해 5월 경기도 남양주에서 근처 공장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을 열었다. 참사 1년 뒤인 2010년 2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작은 옷가게를 열었지만 난생처음 하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손님은 없고 재고만 쌓였다. 결국 저녁에는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변변찮아도 계속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남의 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니까 기분이 묘했다”고 했다. 박씨는 1년 뒤 옷가게 자리에 실내포장마차를 열었고, 이마저도 정리하고 결국 남양주로 왔다.


1996년부터 중국집 ‘공화춘’을 운영하던 김대원(45)씨는 지금은 누나가 운영하는 서울 대학로 치킨집에서 서빙과 배달을 한다. 주방장 월급을 주고도 월 500만원은 벌었다던 중국집 사장은 이태원 어머니 집에 얹혀산다. 김씨는 용산에서 밀려나기 전 종로에서도 보상도 못 받고 건물주에게 쫓겨난 경험이 있다. “종로에 이어 용산까지 두번이나 그런 일을 당했더니 이제는 장사하는 게 무섭다”고 했다.


용산에서 비디오·책 대여점 ‘책볼까 비디오볼까’를 운영했던 박선영(46)씨는 지금은 탄산음료 판매원을 한다. 하루에 대형마트 다섯 군데를 돌면서 제품을 진열하고 영업을 한다. 2010년 7월에 시작한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 덕에 생계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박씨는 “벌이는 줄었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노한나(58)씨는 용산에서 9년간 ‘153 당구장’을 운영했다. 공무원이지만 신장이 나빠져 투석을 해야 하는 남편(휴직)과 아들(33), 딸(29)의 생계를 그가 책임졌다. 297㎡ 크기의 당구장은 아파트를 담보로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아 시작했다. 권리금을 1억원 넘게 줬다. 보증금 5000만원을 묻어두고 다달이 월세 200만원을 내는 자리였다. 아르바이트 한명을 두고도 하루 30만~40만원씩 들어오는 현찰을 만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 노씨는 월급 120만원을 받고 관악구 신림동의 한 장난감 공장에서 포장 일을 한다.


노씨는 지난 6년간 직장 다섯 군데를 전전했다. 서울 강남의 사우나에서 매점 일을, 이후 성북구 미아동 한 병원에서 환자 안내 업무를 했다. 다단계 화장품도 팔았다. 호프집도 해봤지만 빚만 늘었다. 노씨는 “아들이 이따금 ‘당구장이 그대로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땐 우리 가족도 중산층으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용산참사 당시 당구장을 운영하며 32평형 아파트에 살던 노한나씨는 현재 서울 관악구 청림동에 있는 10여 평 규모의 한 임대 아파트에서 남편,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 지상에서 지하로…흩어진 가족들

당구장이 철거되면서 노씨 가족의 삶도 ‘철거’됐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106㎡짜리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33㎡ 크기의 방 두개짜리 관악구 임대아파트에서 산다. ‘중산층’ 시절 자식을 위해 청약받아뒀던 임대아파트가 온 가족의 집이 됐다. 큰방을 아들이, 작은방을 자신과 딸이 함께 쓴다. 노씨는 “용산으로 인해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샤뜰레’의 주인이던 박씨는 6년 전에는 신림동에서 큰아들 부부, 손자와 함께 살았다. 지금은 가족과 떨어져 식당이 있는 남양주에서 혼자 산다.


용산에서 건물 두개 층에 ‘뉴모텔’을 운영하던 송아무개(75)씨는 하는 일도 집도 없다. 두 아들 집을 전전하다 지금은 용산에 있는 친구네 집에서 산다. 40대 중반인 두 아들은 비정규직, 무직이다. 15년간 보경식당을 운영했던 최아무개(72)씨도 마찬가지다. 식당에 딸린 집에 살았던 그는, 강동구 상일동 조카 집에 얹혀산다. 임대아파트라 발 뻗기가 미안하다.


송씨나 최씨처럼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한 이들은 주로 고령자다. 15년 넘게 포장마차를 했던 정아무개(63)씨는 가사도우미를 하다 4년 전부터 다리가 아파 쉬고 있다. 정씨는 혼자 월세 18만원짜리 임대아파트(49㎡)에 산다. 철거 전에는 76㎡짜리 일반 아파트에서 살았다.


‘우동 포차’를 운영하던 문아무개(64)씨는 참사 뒤 1년여 이어진 협상 과정에서 몸을 많이 상했다고 한다. 문씨는 “지금은 지하층에서 사는데, 그래도 일 벌어지기 전에는 지하에는 안 살았다”고 했다. 그는 용산에서 밀려난 뒤 도봉구 쌍문동으로, 쌍문동에서 다시 근처의 수유동으로 이사했다. ‘회사원 월급’ 정도는 혼자 벌었던 이들은, 이제 노령연금 20만원, 독거노인수당 40여만원이 수입의 전부다.


■ “이제라도 생계 대책을…”

철거민들은 2010년 1월 ‘함바집’(공사장 식당) 운영을 약속받고 용산을 떠났다. 삶의 터전을 내주는 대신 생계 대책으로 재개발 공사 기간 동안 노동자들이 이용할 식당 운영권을 받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용산4구역 재개발사업은 현재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2011년 재개발조합과 시공사 간 추가 분담금 문제로 계약이 해지됐다. 현재는 시공사 재선정 과정을 밟고 있지만,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이 문제다.


서울시 도시재생본부 재생정책기획관 도시활성화과는 “유족위로금과 보상금, 민형사 소송 취하 등 합의 당시 철거민들에게 약속했던 것들은 대부분 이행했다. 다만 공사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아 식당 운영권을 주겠다는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공사가 시작돼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서울시는 정비사업이 빨리 진행되도록 돕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은 “시공사 선정도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라도 서울시가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했다.


6명이 숨지고 24명이 다치며 철거된 용산4구역은 6년이 지난 지금도 허허벌판이다.

 

최우리 박기용 이재욱 기자 ecowoori@hani.co.kr


“지자체·민간 함께 개발효과 예측시스템 마련을”


“대규모 아닌 개별건물 단위로
공사해야 철거민대책 마련 쉬워” 지적


재개발 사업 철거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경제적 신분 강등’을 피해가기 어렵다. 생계 대책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의 요구가 절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재 철거가 진행 중인 서울 종로구 순화동과 동작구 상도4동, 부산 북구 만덕 5지구 등에서는 철거에 맞선 주민들의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3년 전 ‘뉴타운 출구전략’을 발표했다. 지난 2일까지 683개 뉴타운·재개발 지역 가운데 주민들이 ‘출구’를 찾아나선 190곳의 사업이 해제됐다. 서울시는 최근 도시재생본부를 신설했다. 대규모 철거가 따르는 대규모 개발을 줄여나가겠다는 취지다.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대규모 공사가 아닌 개별 건물 단위 공사를 해야 철거민 생계 대책 마련을 포함한 개발 관련 분쟁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미국에는 도시마다 독립기관인 재개발청이 있어 재개발 사업을 감시·감독한다. 개발사업의 미래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비용과 편익을 면밀히 분석하고, 철거민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를 만든다고 한다. 개발 경험이 없는 주민 재개발조합이 시공사의 요구에 따라 건설 계획을 수시로 바꾸는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다르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는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이 함께 개발 효과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 지자체의 대응은 전문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