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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11-19 19:07

 

백성들을 수탈하며 권세 불리기에만 골몰해 있는 지배자들로 망해가는 나라 걱정 때문에 밤낮으로 탄식하고 흐느꼈다는 남명 선생의 목소리는 지금도 절절하다. 왕조시대도 아닌 지금 남명 선생의 탄식과 절망에서 전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라 꼴이 돌아가는 것에 탄식을 하다 보면,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그것은 500년 전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임금(명종)에게 올린 저 통렬한 ‘을묘상소’이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하늘의 뜻도 떠나갔으며,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컨대,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를 지경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내직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당파와 권세 불리기에 여념이 없고,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臣)이 낮에는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이 탄식하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며 흐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명 선생은, 알다시피, 조선시대의 가장 기개 높은 선비 중 한 사람이었다. 이 글은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받지 않겠다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그는 조금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궁극적인 책임은 임금에게 있다고 서슴없이 직언하고 있다. 아무리 세상에서 존경받는 선비가 쓴 것일지라도 이렇게 대놓고 임금을 비판하는 글을 읽은 어린 왕과 (수렴정치를 하던) 그 모후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격분한 왕이 남명을 죽이려 하자 “불쾌한 상소를 올렸다고 해서 선비를 죽이면 그것은 나라의 언로를 막는 행위”라는 사간원의 논리와 유생들의 반대 때문에 결국 임금은 자신의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라가 위난에 빠졌을 때 실제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남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학들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임금과 조정의 고관들이었지만, 스스로 궐기하여 왜병과 맞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망해가는 나라를 건진 것은 의병들이었다. 그리고 의병들을 이끈 대부분의 지도자는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백성들을 끊임없이 수탈하며 자신들의 권세 불리기에만 골몰해 있는 지배자들로 망해가는 나라 걱정 때문에 밤낮으로 탄식하고 흐느꼈다는 남명 선생의 목소리는 지금도 절절하다. 그런데 왕조시대도 아닌 지금 이러한 남명 선생의 탄식과 절망이 우리에게 전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솔직히 웃기는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어쭙잖은 글을 쓰는 내 기분도 저 상소문을 쓸 때의 남명 선생의 기분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도 이미 남명 선생이 분명하게 말씀해놓았다. 즉, “전하께서는 온갖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 전하께서는 누구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습니다.”

통탄스러운 것은, 엄연히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지금 우리가 500년 전 왕조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정치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고 사는 날이 거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아니, 그때가 차라리 지금보다 나았던 게 아닐까? 최소한도 그때는 임금 맘대로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선거로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인 통치에 제동을 거는 장치가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오늘의 대한민국에 비한다면 500년 전 조선왕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문명적인 원리로 돌아가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헬조선’이라는 젊은이들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신조어 그대로 이 나라는 지금 절망적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을 더 견딜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요인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이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현재의 고통과 절망을 견뎌내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그런데 나라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인 이 나라의 지배층과 권력자들은 대체 어떤 현상 타개책을 갖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지향하는지 그 비전을 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그들은 온갖 특권을 누리는 데 익숙한 나머지 영구집권의 욕망 속에서 정략적 술수와 책략만 능란하게 구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정치행위라는 것은 비판자와 반대자들을 ‘종북’이니 ‘좌파’니 딱지를 붙여 몰아세우는 상습적 모략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닌가? ‘종북’이라는 것은 상대를 조금이라도 인간으로 여긴다면 결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좌파’라는 것 자체가 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도 꼭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명의 생략 혹은 회피는 이 나라 지배자들의 뿌리 깊은 생리이다. 예컨대, 그들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강조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사상과 표현과 결사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임을 외면한다. 그리하여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어떻게 자유민주주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는지 전혀 설명해주지도 않고 그냥 밀어붙이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비에트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이 세계에 가능한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 말고는 없다는 논리를 편 유명한 보수파 사상가이지만, 그가 근래의 저술 속에서 부쩍 강조하는 것이 국가의 ‘설명책임’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집권자의 국민에 대한 ‘설명책임’이 불가결하다고 역설한다. 가령 덴마크가 좋은 나라인 것은 공공사업이나 새 정책을 펼 때 반드시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 정부는 설명다운 설명은커녕 도리어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로 일관하고 있다. 세월호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무책임하다기보다 철저히 부도덕한 자세는 여기서 새삼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젊은이들의 사기를 조금이나마 살리기 위해 시작하려는 ‘청년배당’ 사업도 정부의 방해 때문에 좌절될 위기에 있다. 시민들의 환영을 받을 만한 복지시책은 오직 중앙정부만 시행할 수 있다면, 지방자치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장, 당사자, 지역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완강한 버릇은 완전히 고질이 되어 있다. 핵발전소 건설 문제로 작년에는 삼척, 최근에는 영덕에서 주민들이 어렵사리 성사시킨 자발적인 주민투표를 정부는 ‘국가사무’라는 이유로 불법시하고 있다. 대체 나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가?

결국 이 정부의 갖가지 명분 없는 정책들은 동시에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것이기에 거기에 어떠한 합리적인 논거가 있을 수가 없다. 그 대신 들어서는 게 거짓말, 은폐, 속임수이다. 99.9%의 학자들을 ‘적’으로 돌리는 교과서 국정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 논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이런 거짓말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상황이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국가운영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잘못할 수 있고, 그런 경우 깨끗이 사과하면 된다. 지금처럼 거짓말을 반복한다면 재앙은 필연적이다. 거짓말이 일상화된 정치가 끝없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결국 온 나라에 ‘니힐리즘’만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무서운 상황으로 우리는 빠르게 들어가고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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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제4회 코리아국제포럼 다시보기] 9월19일 <경제와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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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10월항쟁 70주기, 대구역서 전국노동자대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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