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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8-15 18:04수정 :2015-08-17 09:53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
[오키나와 현지 4박5일 르포]
이 글은 ‘5·18기념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3년 12월 15~19일 오키나와 현지 취재한 내용을, 재단이 발행하는 <아시아 저널> 2014년 봄, 제8호 기획 시리즈 ‘아시아 기억의 공간’에 ‘오키나와’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실은 르포르타주다.
지금과는 1년 반이 넘는 시차가 있지만, 2차대전 때 수십만이 희생된 오키나와인들의 미군기지 반대운동, 그곳에 끌려가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 징병·징용자들과 일본군 위안부들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이 오키나와 르포를 결행케 한 문제의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맥락에서 2013년 12월의 오키나와는 2015년 8월의 오키나와와 동시대적 공간이요 현장이며, 이 르포 또한 과거가 아닌 현재의 것이다.

오키나와=글·사진 한승동 문화부 선임기자 sdhan@hani.co.kr

 

 이 섬은 왜 조용해졌을까
 왜 말하려 하지 않는가
 여자들의 슬픔을
 조선반도의 오빠 언니들의 얘기를

 갈라지고 끌려온 오빠들
 작열하는 뱃바닥에서 숨을 거두어
 오키나와 이 땅에서 수족이 찢겨지고
 영혼을 짓밟힌 오빠들이여

 전쟁이 끝나 시간이 흘렀어도
 이 땅에서 군화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빼앗긴 땅 사라진 마을 여자들의 비명은 여전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메말라버린 채

 오빠들이여
 아직 공양도 못 받고 석회암 틈에 파묻힌 뼈 뼈 뼈
 고향선산에 돌아갈 수도 없는
 오빠들이여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은
 아직도 군화에 짓밟히고 있는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
 깊이 머리를 숙인다

 일본군 성노예로서 짓밟힌 언니들
 징용자로서 희생당한 오빠들에게 깊이 머리를 숙인다
 머지않아 굳게 열매진 봉선화씨가 터져
 서로 바다를 건너 꽃피기를 믿으며

 오빠 언니들이여 그대들이 겪어오신 고난을 전하며
 지구상에서 전쟁과 군대를 뿌리뽑을 것을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
 우리는 맹세한다

2013년 12월 17일, 오키나와(沖繩) 가데나(嘉手納) 공군기지 바로 위의 나카가미군(中頭郡) 요미탄손(讀谷村) 세나하(瀨名波)의 좁다란 시골길 옆 풀숲 저만치에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하얀 바탕에 파란 페인트로 그린 화살표와 ‘한의 비(恨の碑)’라는 글자.
그것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자 우리 농촌의 당산나무 아래와 같은 터가 나오고 그 옆 둔덕에 사람 키만 한 부조상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병사와 눈이 가려진 채 처형대로 끌려가는 남자,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꿇어앉아 울부짖는 늙은 어머니.
그 옆에 세운 화강암 비석에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라는 제목을 단 이 비문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나카가미군(中頭郡) 요미탄손(讀谷村) 세나하(瀨名波)의 좁다란 시골길 옆 풀숲에 놓여 있는 ‘한의 비(恨の碑)’ 표지판.
나카가미군(中頭郡) 요미탄손(讀谷村) 세나하(瀨名波)의 좁다란 시골길 옆 풀숲에 놓여 있는 ‘한의 비(恨の碑)’ 표지판.

‘한의 비’ 옆에 세워진 부조상.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병사와 눈이 가려진 채 처형대로 끌려가는 남자(조선인),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꿇어앉아 울부짖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을 새겼다. 그 옆에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를 새긴 비석이 서 있다.
‘한의 비’ 옆에 세워진 부조상.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병사와 눈이 가려진 채 처형대로 끌려가는 남자(조선인),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꿇어앉아 울부짖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을 새겼다. 그 옆에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를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가 새겨진 비석. 왼쪽은 일본어, 오른쪽은 한국어.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가 새겨진 비석. 왼쪽은 일본어, 오른쪽은 한국어.

   

1.
미군기지들에 점령당한 오키나와

나하 공항은 군용비행장?

그 이틀 전인 12월 15일 정오 무렵.
얕게 깔린 산호초가 들여다보이는 맑고 푸른 오키나와 바다 바로 위를 스치듯 날아가던 비행기가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하(那覇) 공항 청사 쪽으로 다가가는 비행기 창을 통해 공항 주변의 풍경들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인상적이었다.
육상 자위대, 해상 보안청 등의 커다란 글자들이 박힌 격납고 같은 건물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그 앞에는 크고 작은 군용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분명 민간여객기가 내려앉은 활주로인데? 저건 훈련기, 정찰기, 수송기, 그리고 전투기, 헬기, 저건 P3C? 나하 공항은 민군 공용인가?
나중에 지도를 보니 그 주변엔 육상 자위대 훈련장, 공군 자위대 고사(高射)훈련장, 육상 자위대 주둔지, 공군 자위대와 해상 자위대 기지가 좍 깔려 있었다.
거기에 미군기들은 없었다.

하지만 나하 공항을 나와 리무진 버스로 50분쯤 걸리는(인천공항 갈 때 탔던 버스에 비하면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바로 그 북쪽 차탄(北谷) 지역에 있는 숙소로 갈 때 길 양옆에 보이는 건 온통 철조망을 두른 미군기지들이었다.
먼저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의 상징처럼 돼버린 기노완(宜野灣)의 후텐마(普天間) 미 해병대 기지, 캠프 즈케란(포스터), 캠프 구와에(레스터), 캠프 버틀러가 죽 이어졌고, 차탄 바로 북쪽은 동아시아 최대의 미 공군기지 가데나가 있었다.
또 그 북쪽 요미탄(讀谷)부터는 도리이 통신시설, 세나하 통신시설, 요미탄 보조비행장, 가데나 탄약고, 그 오른쪽엔 캠프 코트니, 다시 더 위쪽 나고(名護)시까지 거대한 캠프 한센, 캠프 슈와브, 헤노코(邊野古) 탄약고….
도로변의 후텐마 기지 철조망 안쪽엔 옅은 미색의 층수가 불분명한 직사각형의 낮은 블록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건물 주변 공간들엔 근무자들이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주차돼 있었다. 제주도의 작은 오름처럼 생긴, 잔디로 덮은 봉긋한 석유 저장고 탱크들도 곳곳에 보였다. 하지만 썰렁할 만큼 사람들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키나와 나하 북쪽 차탄 인근에 있는 동아시아 최대의 미 공군기지 가데나.
오키나와 나하 북쪽 차탄 인근에 있는 동아시아 최대의 미 공군기지 가데나.

오키나와 섬 해안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군 기지들에 둘러쳐진 철조망.
오키나와 섬 해안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군 기지들에 둘러쳐진 철조망.
리무진 버스를 타기 전 공항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오기를 기다리면서 보조원 명찰을 단 붙임성 좋은 청년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30대 초반 나이로 보이는 ‘나카보(中坊)’씨는 버스 배차시각부터 오키나와 관광에 이르기까지 무슨 얘기든 거침없이 술술 얘기를 잘 했다. 한데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거기에 대해 나는 뭐라 얘기할 수 없다”고 딱 잡아뗐다.
왜 그런가?
“어머니가 가데나 기지에서 일한다. 여긴 그런 사람들이 많다.”

후텐마 기지 얘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 열흘 뒤쯤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 오키나와현 지사가 후텐마 기지를 북쪽 나고시 헤노코의 캠프 슈와브 해안 쪽으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게 오키나와 주민들 최대 관심사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헤노코로의 기지 이전에 대해 오키나와 주민의 64%가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내용이 그 며칠 뒤인 12월 17일 현지의 양대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오키나와 타임스> 1면 머리기사였다.
그것은 곧 오키나와 주민의 3분의 2가 미국과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헤노코로의 기지 이전, 곧 헤노코 앞바다 매립을 나카이마 지사가 승인해줘선 안 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열흘 뒤 나카이마 지사는 주민들의 그런 바람을 배반했다.
주민들이 격앙했고, 현 의회 의원들은 찬성 다수로 지사 사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오키나와 역사에서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오키나와 타임스(沖縄タイムス)>, 그리고 함께 오키나와 여론을 주도해 온 <류큐신보(琉球新報)>는 사설에서 헤노코로의 기지 이전을 끊임없이 종용한 아베 신조 자민당 정권의 회유(돈)와 압박에 굴복한 나카이마 지사를 배신자라며 강도 높게 규탄했다.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경제기여도는 고작 5%

오키나와 도착 당일 저녁에 만난 와카바야시 치요(若林千代) 오키나와대 교수(정치학)는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지역경제 기여도는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1993년에 창간된 오키나와 주민 평화운동 대변지 계간 <케시카지>(けーし風) 편집장인 오카모토 유키코(岡本由希子), 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의 공동대표 아사토 에이코(安里英子)씨 등 그날 함께 만난 이들도 주일 미군기지의 74%가 몰려 있는 오키나와, 그 오키나와 본도의 약 20%를 뒤덮고 있는 미군기지가 오키나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다며, 그 때문에 오키나와 보수층조차 최근엔 미군기지 반대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했다.
아사토씨는 바로 한의 비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을 쓴 사람이다.

기지 고용 주민들이 받는 임금도 결국 일본 중앙정부가 미군에 제공하는 오모이야리(배려 예산)로 지불한다.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금 현지 미군기지에 고용돼 있는 오키나와 주민은 7천~8천 명 정도.
외래객인 내게 먼저 말을 걸어 “미군기지가 지금 철수해버리면 일본을 지킬 수 없다”고 했던 나이 든 택시 운전수가 얘기한 미군기지 고용 현지 주민수도 그 정도였다.
평균 3~4인으로 추산되는 관련 가족들을 모두 합쳐도 미군기지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오키나와 인구는 2만~3만 명. 140만이라는 오키나와 전체인구의 3%도 채 되지 않는다.

‘오키나와 평화네트워크’ 사무국의 이나후쿠 쓰토무(稻福勉)씨와 함께 2차대전 말기 20만 명 이상이 숨진 오키나와 중남부의 격전지 주민 학살현장을 안내해 준 오카다 게이코(岡田耕子) ‘오키나와평화 시민연대’ 활동가는 “오키나와 경제를 위해서는 미군기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서 말했다.
“지금 일본에서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 전체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 1%가 바로 오키나와 주민들이다.”
적어도 오키나와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후텐마 미 해병대기지의 오키나와 현내 이전, 즉 오키나와 북동부 나고시 헤노코로의 이전에 반대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들 중 다수는 미군기지 자체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코씨의 말이 더 가슴 아픈 것은, 그의 그 말에는 일본 본토가 오키나와가 거의 전적으로 부담을 떠안고 있는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주둔에 찬성하고 있다, 아니 본토의 일본인들은 그 문제로 인한 오키나와인들의 고통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그곳 주민들의 배반감과 자조, 냉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아니라 오키나와인으로

오키나와 중심도시 나하 중심가에 있는 시청 앞 광장에서 “(나카이마) 지사는 ‘헤노코 (해안) 매립’을 승인해주지 마라”는 등의 구호가 큼직하게 적힌 천막을 치고 마이크를 들고 거리연설을 하면서 농성시위를 벌이는 노인들.
오키나와 중심도시 나하 중심가에 있는 시청 앞 광장에서 “(나카이마) 지사는 ‘헤노코 (해안) 매립’을 승인해주지 마라”는 등의 구호가 큼직하게 적힌 천막을 치고 마이크를 들고 거리연설을 하면서 농성시위를 벌이는 노인들.

오키나와 남부 기노완(宜野灣)의 후텐마(普天間)에 있는 미 해병대 기지의 노다케 게이트 앞에서 기지반대 시위를 벌이는 10여명의 노인들.
오키나와 남부 기노완(宜野灣)의 후텐마(普天間)에 있는 미 해병대 기지의 노다케 게이트 앞에서 기지반대 시위를 벌이는 10여명의 노인들.
‘일본인’이 아니라 ‘오키나와인’으로 호칭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후텐마 기지 정문 앞과 시청 앞 광장에서 “NO!” “OUT!”를 외치며 연일 기지반대, 헤노코 이전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던 65살이 넘은 노인들에게서도 읽을 수 있었다.
미군이 탄 차량들이 기지에서 나올 때마다 운전석 바로 앞쪽으로 손을 치켜들고는 “노!”와 “아웃!”을 외쳐대던 풍경, “NO FLY ZONE!” “OSPREYS OUT!(신형 수직이착륙 수송기 오스프레이 배치 반대)” “MARINES OUT!(미 해병대 철수)” 등의 깃발이 무수히 나부끼던 그 풍경 위로, 바로 그 뒤쪽 후텐마 활주로에서 이륙한 C-17로 보이는 거대한 수송기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바로 눈앞에서 시위현장 쪽을 향해 솟아올랐다.
그 순간 비현실적으로 비쳤던 그 기묘한 광경이 눈에 선하다.

하루 종일 오키나와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의 전천후 전투기 F-15C 이글, 또는 전폭기 F-15E 스트라이크 이글.
하루 종일 오키나와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의 전천후 전투기 F-15C 이글, 또는 전폭기 F-15E 스트라이크 이글.

오키나와에선 그런 수송기와 전투기들이 하루 종일 날아다닌다.
보통 두어 대가 함께 날아다니며 가장 날카롭고 강력한 소음을 내뿜는 작고 날렵한 기종은 보잉이 개량한 전천후 전투기 F-15C 이글이거나 전폭기 F-15E 스트라이크 이글인 것 같았다.
가데나 공군기지를 조망할 수 있는 인근 간이휴게소 에키노미치 가데나 4층에서 천지를 진동하며 활주로를 질주하다 날아오르는 비슷한 기종의 전투기 2대를 봤다.
무슨 비행기냐고 묻자 이나후쿠씨는 F-15C 이글이라고 했다.

2천 헥타르로 가데나시 전체 면적의 83%를 차지하고 있는 가데나 공군기지는 미군에 수용되기 전에는 그곳 농민들이 경작하던 널따란 사탕수수밭이었다.
강제동원된 많은 조선인 군부들도 미군이 확장하기 전 일본군이 그곳에 건설한 비행장 건설공사에 동원돼 “노예처럼 사역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텐마 기지에서 나오는 자동차 안의 미군들은 바로 바깥에서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시위자들의 야유와 고함에 익숙해진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자신들이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 무표정, 무관심. 그게 저들의 전략이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 앞의 시위

후텐마 기지 노다케 정문에서 기지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68살 우에마 요시코(68)씨. 그녀는 “전쟁(2차대전) 뒤 (미군에게) 오키나와를 빼앗겼다. 미군기지 때문에 오키나와의 자립적 사회 건설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후텐마 기지 노다케 정문에서 기지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68살 우에마 요시코(68)씨. 그녀는 “전쟁(2차대전) 뒤 (미군에게) 오키나와를 빼앗겼다. 미군기지 때문에 오키나와의 자립적 사회 건설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10여명의 노인들과 함께 후텐마 기지의 노다케 게이트 쪽 정문 앞에서 “NO!”라고 쓴 큼직한 구호판을 들고 기지 반대를 외쳐대던 곱게 늙은 할머니 우에마 요시코(68)씨는 “전쟁(2차대전) 뒤 (미군에게) 오키나와를 빼앗겼다”며 “미군기지 때문에 오키나와의 자립적 사회 건설이 불가능해졌다”고 했다.
그도 오키나와 주둔 미군 경비의 70%를 일본 정부(국민)가 부담하는 상황에서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경제 기여도가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의회와 시·정(町)·촌(村) 모두, 오키나와 주민 전체가 오키나와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미군기지에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 인근 지바현 생활협동조합(COOP)에서 일하다 60살에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줄곧 기지 반대운동을 해온 우에마 요시코씨는 그날처럼 비가 오거나 더운 여름 한낮이 시위하기엔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는 서울과 제주도 강정, 광주 등에도 가 봤다며, 1년에 한두 차례는 한국에 가서 한국 시민들과 연대활동을 벌인다는 말도 했다.

같은 구호판을 든 73살 할머니 도카시키 기요코(渡嘉敷喜代子)씨는 “생명 바쳐서 이 싸움을 하고 있다”면서 “여기서 우리가 지면 오키나와 전체가 진다. 한국민들도 적극적으로 응원해 달라”고 했다. 그는 “비밀보호법 등을 통과시킨 아베의 우경화는 결국 전쟁 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후텐마 기지 노다케 정문에서 기지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81살 할아버지 오타 초키(大田朝暉)씨.
후텐마 기지 노다케 정문에서 기지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81살 할아버지 오타 초키(大田朝暉)씨.
그날 집회를 이끈 행동대장 쯤으로 보이는 오타 초키(大田朝暉)씨는 81살 노인이었다.
그는 중-일 간의 센카쿠(댜오위다오) 분쟁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며, 그 때문에 중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한국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지 않으냐던 그는 나비와 나비먹이 공급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나비가 춤추는 평화로운 섬 오키나와를!! 거점이 되는 것은 학교다!!” “오오고마다라(오키나와 이남에서만 자생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나비)를 날리자!!”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하 중심가 시청 앞 광장에서 “(나카이마) 지사는 ‘헤노코 (해안) 매립’을 승인해주지 마라”는 구호가 큼직하게 적힌 천막을 치고 마이크를 들고 거리연설을 하면서 농성시위를 벌이던 것도 그들 노인이었다.
아쉽게도 그런 자리에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우에마 요시코씨는 그런 시위현장에 “젊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한국이 너무너무 부럽다”고 했다.
오키나와 노인들은 그럼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긴 세월 그런 작업을 줄기차게 이어가고 있었다.

“기지가 없어져야 오키나와는 발전한다”

혼슈(본토) 출신임에도 와카바야시 교수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와카바야시 교수는 하와이를 찾는 관광객이 연간 1천만인데 비해 오키나와는 600만이라면서, 관광산업, 사람과 화물이 거쳐가는 항공·해상 관제 허브로서의 지정학적 가치, 중계무역 등을 활용하면 기지 없이도 오키나와는 자립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와카바야시 교수는 이번 오키나와 취재에서 전반적인 상황 설명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현지인들을 소개하고 안내를 주선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오키나와를 떠나기 하루 전 저녁식사를 함께한 미디어 <티시티 뉴스>(TCT News)의 다카미네 도모카즈(高嶺朝一) 대표 등 와카바야시 교수 주변의 오키나와 지식인 그룹의 생각이 그와 다르지 않았다.
오키나와 양대 신문 중 하나인 <류큐신보> 사장 출신인 다카미네 대표의 생각은 오키나와 지식인 주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지가 없어야 오키나와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오키나와섬 곳곳을 차지하고 앉은 기지들이 자연과 경제·문화 토대를 파괴하고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미 문제가 된 미군기지의 토양오염 문제를 그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지닌 주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고 있는 모양이다.

도시들이 확장되면서 시가지에 포위된 일부 미군기지 땅들이 민간토지로 전환되고 있었고 거기에는 대규모 위락시설이나 일본 본토와 미국 등의 외래자본들이 짓는 대형 마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키나와 토착경제를 위협하는 그들을 경계했다.

후텐마 기지 앞에서 시위 중인 73살 할머니 도카시키 기요코(渡嘉敷喜代子)씨. “생명 바쳐서 이 싸움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지면 오키나와 전체가 진다. 한국민들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기 바란다. 비밀보호법 등을 통과시킨 아베의 우경화는 결국 전쟁 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후텐마 기지 앞에서 시위 중인 73살 할머니 도카시키 기요코(渡嘉敷喜代子)씨. “생명 바쳐서 이 싸움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지면 오키나와 전체가 진다. 한국민들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기 바란다. 비밀보호법 등을 통과시킨 아베의 우경화는 결국 전쟁 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돈의 위력 앞에 무너진 나카이마 지사

그럼에도 나카이마 지사는 결국 후텐마 기지의 현내 이전을 받아들였다.
자민당 지원을 받아 지사로 당선됐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후텐마 기지 현내 이전 반대 여론에 눌려 현내 이전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눈치를 살피던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만나 거액의 중앙정부 보조금 지원 약속을 받아낸 직후 자신의 공약을 뒤집어버렸다.

(나카이마 지사는 2014년 11월 16일 실시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 자민당과 차세대당 추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후텐마 미군 비행장의 헤노코 이전, 즉 오키나와 현 내 이전 반대를 천명한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에게 패해 3선에 실패했다.
나하 시장 출신인 오나가 신임 지사는 당시 “이제 미군기지는 오키나와 경제발전의 저해요인이 됐다. 정부가 강행하려는 헤노코 새 기지 건설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오나가의 현 지사 선거 출마로 공석이 된 나하 시장 선거도 같은 날 실시돼 오나가의 측근이 당선됐다. 이는 미군기지와 일본 중앙정부 정책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거부 정서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일본의 영토분쟁>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등의 저자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는 최근 또 다른 책에서 아베 정권하에서 헤노코로의 기지 이전 작업이 착착 진행되는 이면에는 돈의 위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무성 국제정보국장, 이란 주재 대사 등을 역임한 외무관료 출신인 그는 나고시에 속하는 헤노코 지역 어민들 다수가 시장을 비롯한 나고 시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노코로의 기지 이전에 찬성하고 있는 이유는 그 지역 1가구당 1억 엔이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떠올렸다.
2000년대 전반기에 제시한 액수가 1억 엔(10억 원!)이었다고 하니, 지금의 아베 정권이 제시한 금액은 그보다 훨씬 더 커졌을지 모른다.

캠프 슈와브에서 쫓겨나다

문제의 캠프 슈와브를 살펴보기 위해 두어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찾아간 헤노코 지역은, 택시를 타기 위해 길가 가게에 들어가 택시회사에 전화를 부탁한 뒤 택시 오기를 25분이나 기다려야 하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에 앞서 길에서 만난 50대로 보이는 남성에게 택시를 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25분 얘기를 들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더니 택시회사로 전화를 걸었고 이쪽 사정을 얘기하더니 오긴 오겠다는데 25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빗방울까지 떨어지고 있던 판에 어둑한 길가에 서서 25분이나 기다려 택시를 타야 하다니. 2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들 중에 택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빈 택시는 아예 없었다.
한심한 생각이 들어 고맙다, 다른 택시를 찾아보겠다고 하고 저만치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던 것인데, 거기서도 또 25분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그냥 있을 수 없어서 허술한 잡화점인 그 가게 물건을 몇 가지 샀다. 이런 때는 ‘일본인’으로 통칭되기 십상인 그들의 예의 그 친절과 깍듯함을 다시 한 번 절감하며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과 표준시각은 같지만 한국보다 해가 1시간은 먼저 떠서 먼저 지는 일본에서 헤노코 지역 겨울은 오후 5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어둑어둑했고 택시가 왔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그날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에 택시를 탄 채 주마간산이나마 해 보기로 했다.
헤노코 주민회관 같은 곳에 들렀으나 불만 켜져 있고 아무도 없었다. 영어 간판들이 늘더니 드디어 환하게 불을 켠 캠프 슈와브 정문이 나타났다.
도로에서 정문까지 100미터쯤 되어 보이는 30미터 정도 너비의 널따란 입구는 1.5미터 정도의 높이에 길이 2미터 정도의 플라스틱 차단벽들이 지그재그로 계속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삼엄한 철조망으로 막아 놓은 출입구. 그 모습이나마 카메라에 담으려고 택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선 채 셔터를 몇 번 눌렀더니 야간촬영 플래시가 번쩍거렸고 그 순간 제복 차림의 경비 2명이 무슨 소리를 내지르며 위협적인 자세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사도 예상을 못했던지 허둥지둥 나를 태우고 뒤로 물러섰다. 저만치 물러나 도로 쪽에 가까운 데서나마 불빛 속에 드러난 캠프 슈와브 입구 모습이라도 담아가려고 다시 택시 문을 열고 나가 카메라를 그쪽으로 향하는데, 이런, 경비병이 거기까지 쫓아와 고함치며 삿대질을 해댔다.
정면으로 맞닥뜨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따져볼 용기가 없어,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다.

오키나와 섬 북쪽 나고(名護)시 인근의 마을 헤노코(邊野古)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슈와브 정문. 해 진 뒤 택시를 타고 이곳을 찾아가 사진을 찍다가 달려오는 경비병에 혼비백산했다.
오키나와 섬 북쪽 나고(名護)시 인근의 마을 헤노코(邊野古)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슈와브 정문. 해 진 뒤 택시를 타고 이곳을 찾아가 사진을 찍다가 달려오는 경비병에 혼비백산했다.
운전사 아저씨도 그랬고 나중에 만나 물어본 사람들도 그랬지만, 예전엔 그럴 경우 그렇게 험악하게(?) 나오진 않았다며 의외라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러곤 2001년 9·11사태 이후 그렇게 된 것 같다는 해석을 붙였다.
후텐마가 이전해 올 경우 활주로가 건설될 해안 쪽은 이미 어두워진 뒤라 보이지도 않았거니와 이미 그런 상황에선 길을 물어 찾아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조용한 어촌마을에 한 가구당 1억 엔이라는 돈벼락이 떨어지는데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마고사키에 따르면 배려예산은 1970년대 중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시절, 가네마루 신이 방위청 장관을 할 때 법적 근거도 없이 정치적 판단에 따라 미군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는데, 처음 수십억 엔 정도로 시작한 것이 점점 불어나 2011년도엔 1858억 엔이나 됐다.
여기에다 기지주변대책비 1739억 엔, 토지 등의 임대료 1658억 엔, 미군 재편 관련비용 1161억 엔 등을 합하면 일본 정부가 부담한 금액은 6000억 엔이 넘었다. 일본은 돈으로 미군기지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반감을 억누르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주민 평균소득 수준이 가장 낮은 지역이다. 낮아도 그냥 낮은 게 아니라 현격하게 낮다.
처음 만난 날 저녁 와카바야시 교수 일행과 얘기하던 중에 내가 가기 바로 전날인 12월14일 <오키나와 타임스>에 오키나와가 빈곤률 전국 최고라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 얘기가 생각나 나중에 찾아봤다.
야마가타대학(山形大学)의 도무로 겐사쿠(戶室健作) 준교수(사회정책)가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그 기사에서, 필요 최저 생활비도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률이 오키나와는 29.3%로, 바로 그 아래 2위인 고치현의 21.7%보다 현격하게 높았다.
전국 평균 14.4%의 2배가 넘는다. 취업세대 중 최저생활비 이하를 버는 워킹푸어 비율도 오키나와가 20.5%고, 그 다음으로 많은 오사카가 11.3%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들 빈곤층 중에서 생활보호를 받고 있는 세대의 비율은 오키나와가 가장 낮은 9.8%다. 전국평균은 14.3%.
일본 중앙정부는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붙잡아두기 위한 돈은 쏟아붓지만 정작 주민생활 쪽엔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긴가?

미군이 오키나와와 한국에 주둔하는 이유
미일동맹의 식민지적 지위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체 경비의 4분의 3을 일본 정부가 부담해주기 때문”이라고 마고사키는 말했다.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로의 이전 경비도 거의 모두 일본 정부가 댄다. 한국의 방위비분담금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일본의 ‘오모이야리 예산(思いやり予算)’을 본딴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 대추리 대추분교 2차 행정대집행이 이뤄진 다음날인 2006년 5월5일 도두리 들판에 군인들이 쳐놓은 철조망과 경고판이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기도 평택시 대추리 대추분교 2차 행정대집행이 이뤄진 다음날인 2006년 5월5일 도두리 들판에 군인들이 쳐놓은 철조망과 경고판이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이전 경비 역시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대부분 한국 정부가 부담하고 있지 않은가.
미군이 오키나와 다음으로 많은 지상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는 이유는,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주둔경비의 대부분을 한국 정부, 아니 한국 국민이 부담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기지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닮은 곳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의 0.6%밖에 되지 않지만 주일 미군기지의 74~75%가 집중배치돼 있다.
그래서 야마토(大和) 일본이 미군기지 주둔으로 인한 부담을 거의 몽땅 오키나와에 떠넘기고 있는 셈인데, 본토와 오키나와의 그런 불평등한 관계를 종주국과 식민지 관계로 보는 시각이 많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내부 식민지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키나와 현지의 다수 주민들이 품고 있는 분노와 억울함, 거부감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감정이 바로 이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미군기지와 관련해 오키나와의 이 식민지적 지위를 공유하고 있는 게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겐 기지 부담을 몽땅 떠넘길 식민지가 없다.
아니 범위를 조금만 넓혀 보면,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가 오키나와와 더불어 동아시아 미일 동맹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최전선이요 그들의 식민지일 수 있다고 하면 터무니없는 왜곡이요 과장일까.

오키나와인들이 야마톤추(大和人)라고 부르는 일본 본토 사람들을 불신하고, ‘오키나와 독립’ 얘기가 나올 정도로 탈일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는 기지 문제뿐만 아니라 더 뿌리깊은 이유들이 작용하고 있다.
근대의 비통한 역사가 그 중심에 있다.
1995년에 일어난 미 해병대원들의 어린 여중학생 성폭행 사건, 그리고 얼마 전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요당한 ‘집단자결’ 등의 오키나와인들 수난사를 왜곡한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 수정 지시 사건 등을 규탄하는 집회에 오키나와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10만 이상의 주민들이 모였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 오키나와가 근대의 질곡에서 깨어나고 있다.

후텐마 기지 내부를 멀리서나마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서 기지 안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후텐마 기지 내부를 멀리서나마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서 기지 안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2.
오키나와의 비극

치비치리 가마(동굴)의 참극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16일, 숙박소 위쪽의 요미탄으로 갔다.
1945년 4월 1일, 18만명의 지상전투부대원들, 후방지원부대까지 합하면 54만에 이르는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 요미탄에서 가데나, 차탄에 이르는 서쪽 해안지대였다.
그로부터 일본이 항복하는 그 몇 개월간 24만에 이르는 엄청난 사람들이 좁은 오키나와 본섬과 인근 작은 섬들에서 죽어나갔다.
“오키나와전에서는 본토 출신 약 6만5000명의 병사들, 오키나와에서 서둘러 소집된 약 3만명의 급조된 부대원, 일반 민간인 약 9만4000명이 희생당했다. 그밖에 조선반도(한반도)에서 군부(軍夫, 군인·군속)나 종군위안부로 강제연행당한 약 1만명의 사람들 또한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정확한 숫자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오키나와전에서는 본래의 군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오키나와 현대사> 신판, 아라사키 모리테루, 이와나미신서, 2005)

오키나와인들보다 더 심한 차별을 당한 조선사람들의 처참한 흔적은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에 남아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비참한 처지에 내몰렸던 조선사람 희생자들을 일본 정부는 사망자 조사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히 방치했고 지금까지도 외면하고 있다.
그나마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키나와 주민과 그곳에 사는 소수 조선사람들이 애쓴 덕이다.
희생된 조선사람들과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조선사람들은 조국의 분단 때문에 이중삼중으로 차별받는 고통 속에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요미탄 마을의 역사>(讀谷村史)는 그때 군인·군속 2167명, 일반주민 1757명, 합계 3924명의 요미탄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중 31.3%가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었다.
나카가미군 요미탄손 나미히라(波平)라는 동네에 ‘치비치리 가마’가 있다.
‘가마’(ガマ)는 자연동굴이다.
16일 찾아간 마을 아래에는 작은 개천이 흘러가는 움푹 꺼진 곳에 벼랑이 형성돼 있고 거기에 동굴 입구가 보였다. 사연을 새긴 석판과 조형물들을 지나 시커먼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디지털 카메라 불빛을 안쪽으로 비춰봤으나 사람 출입이 금지돼 있는 동굴 안쪽은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됐던지 함께 간 이나후쿠씨가 입구에서 손전등을 비춰주었다. 용감한 척 어둠 속에 뛰어들긴 했으나 그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오키나와 본도의 나카가미군(中頭郡) 요미탄손(讀谷村) 나미히라(波平)라는 동네에 있는 자연동굴 ‘치비치리 가마’. 1944년 10월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전 와중에 이 동굴에 피난해 있던 마을사람 140명 중 85명이 집단자결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동굴 안에 들어간 기자가 입구에서 손전등을 비추는 안내인을 향해 찍은 사진.
오키나와 본도의 나카가미군(中頭郡) 요미탄손(讀谷村) 나미히라(波平)라는 동네에 있는 자연동굴 ‘치비치리 가마’. 1944년 10월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전 와중에 이 동굴에 피난해 있던 마을사람 140명 중 85명이 집단자결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동굴 안에 들어간 기자가 입구에서 손전등을 비추는 안내인을 향해 찍은 사진.

치비치리 가마 입구 쪽에 세워져 있는 ‘치비치리 가마의 노래’.
치비치리 가마 입구 쪽에 세워져 있는 ‘치비치리 가마의 노래’.
1944년 10월 미군기들이 오키나와 공습을 시작한 뒤 나미히라 동민들은 그곳을 피난처로 이용했다.
1945년 3월 이후 그곳에 피난한 사람은 140명이었다.
동굴은 크지 않고 천장도 낮아 그만한 수의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과밀상태였다.
4월 1일 상륙한 미군이 그곳으로 왔다. 노인들과 그들의 딸이 죽창을 들고 미군을 향해 달려들었고 노인 두 사람이 사살당했다.
가마 속 주민들은 절망감과 공포에 휩싸였다. 미군에게 붙잡히면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학살한 것처럼 비참하게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일본군으로부터 들은 그들은 포로가 되느니 죽는 게 낫다는 쪽으로 세뇌당한 상태였다.
사이판에서 귀향한 사람 둘이 ‘자결’을 외치며 모포에 불을 붙이자 여성 4명이 이에 반발해 불을 껐다.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결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렸다.

그 다음날 미군이 다시 왔고, 18살 소녀가 엄마 손에 목졸려 죽었다.
엄마는 미군에 당하느니 딸을 ‘강제 자결’시키는 쪽을 택한 것이다.
만주에서 귀향한 종군 간호부로부터 독극물 주사를 맞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14~15명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결했다.
누군가가 다시 모포들을 모아 불을 붙였고 가마 안은 생지옥이 됐다. “아야, 아야”하는 비명소리들이 났다. 아이들이 엄마들 손에 죽어가며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치비치리 가마 피신 140명 중 85명이 그렇게 숨졌다.(<오키나와 전적戰跡북, 가마>, 오키나와현 고교교원노조 교육자료센터 가마편집위원회편, 2013년 6월 개정판)

자마미섬의 집단자결

좀 다른 얘기지만, 오카나와 본섬 남서쪽에 있는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의 자마미(座間味)섬에서 벌어진 ‘집단자결’ 비극에 대한 묘사를 약간 인용해 보자.
당시 상황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마미섬의 미야히라(宮平) 우타씨(당시 43살) 부부는 아이들 3명과 함께 자기집에 파놓은 방공호로 피난했다.
그들은 그때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32군 부대원들로부터 ‘옥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군이 함포에서 쏘아대는 포탄 파편을 뚫고 집합장소인 충혼비까지 가니, 일본군 병사가 방공호에서 ‘옥쇄’하라며 수류탄을 주었다.
그걸 갖고 온 그들이 방공호 안에서 자다 잠이 깬 것은 우타씨가 ‘미군이 오고 있다! 빨리 아이들부터 죽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그는 아내의 목을 자르려고 면도칼로 몇 차례 그은 뒤 11살 아들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9살, 15살의 두 딸,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을 잘랐다. 아들은 죽었고, 나머지는 빈사상태의 중상을 입은 상태로 미군의 손에 구출됐다.

우타 일가족처럼 남자가 있는 가족일수록 희생은 컸다.
죽은 사람 중 여성과 아이들(12살 미만)이 83%나 차지했다.
거기엔 ‘적’에게 당하기 전에 자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가부장제사회의 성도덕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마미섬에서는 촌장 이하 마을의 리더들이 모두 일가족 ‘집단자결’을 했으나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았던 마을이나 섬들에서는 ‘집단자결’이 없었다.”(<군대는 여성을 지켜주지 않는다-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소와 미군의 성폭력>.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wam, 2012)

이 자료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키나와 주민들 집단자결은 주로 일본군의 종용과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집단자결에 사용된 도구는 수류탄과 면도칼 외에 청산가리, 손도끼, 괭이, 낫, 노끈, 식칼, 농약, 돌, 목재 등으로, 생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흉기가 됐다.

그런 ‘집단자결’이라는 학살이 오키나와 본섬은 물론 주변에 흩어진 수많은 섬들, 심지어 먼 대만 인근의 요나구니(与那国)섬에서도 자행됐다.
현장 실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들을 토대로 작성된 <오키나와 전적북, 가마>는 오키나와의 수많은 마을들에서 자행된 그 끔찍한 학살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이토만의 12만 희생

피난민 20만이 몰려 있던 오키나와 본섬 최남단 이토만(糸満)에서는 피난민 사망률이 평균 70%를 넘은 지역이 많고, 최대 94%에 달한 지역도 있다.
이나후쿠씨는 “가마 속으로 피신한 20만 중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8만 정도고 나머지 12만이 죽었다”고 했다.
20만 피난민의 97%는 그곳 현지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남부 3개 지역(村)에서만 주민의 70%에 해당하는 7만이 죽었다”고 이나후쿠씨는 말했다.
많은 주민들이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가마에서 나갈 수도 없었고, 나갔다 온 사람들 중엔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말을 쓰는 놈들은 모두 스파이”라는 말도 했다.

그런 불신과 차별은 군부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에겐 더 가혹했다. 다수의 일본군들이 마지막에 수류탄으로 주민들과 함께 자폭하거나 총을 쏘고 목을 매다는 등 잔혹한 집단자결의 길을 택했다.

그런 가마가 이토만 일대에만 800여 개가 있었다고 들었다.

3만5천 혼령이 안치된 ‘혼백의 탑’

혼백의 탑 안내문이 새겨진 석비. 3만5천명의 주검을 안치했다는 설명이 보인다.
혼백의 탑 안내문이 새겨진 석비. 3만5천명의 주검을 안치했다는 설명이 보인다.
이토만 남부 기타나카구스쿠손(北中城村)에는 ‘혼백(魂魄)의 탑’이 있는데, 돌들을 시멘트로 굳혀 만든 둥그런 봉우리에 돌비석이 서 있는 이 탑을 중심으로 많은 비석들과 기념물들이 서 있는 제법 큰 규모의 추모시설이었다.
한때 3만5천의 유골을 봉안했던 곳이다. 이곳은 살아남은 주민들을 수용소에 보호하고 있던 미군이 미군기지 조성으로 자신들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을 1946년 초 이주시킨 곳이다.
인구가 다시 늘면서 주민들이 논밭을 개간하게 됐고 거기에서 수많은 유골들이 나왔다.
주인도 모르는 그 유골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혼백의 탑이 세워진 곳인데, 1979년에 인근 마부니(摩文仁)에 국립오키나와전몰자묘지가 조성되자 그곳으로 뼈를 대부분 옮겼고 지금은 소수의 상징 유골들만 남아 있다.
이나후쿠씨는 그곳에서 아직도 유골들이 발견되고 있고, 대형 폭탄도 발굴됐다고 했다.

3.
조선인 성노예

제주 4·3의 전주곡?

고희범의 <이것이 제주다>(단비, 2013)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제주도는 거대한 요새였다. 제주도를 빙 둘러 곳곳에 진지가 설치됐고, 박격포와 속사포 등을 갖춘 포병, 보병, 공병 등 각종 군부대가 배치됐다. 1945년 8월 현재 인구 23만이던 제주도에 7만5천여 명의 일본군 병력이 들어와 주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눈앞에 둔 일본이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어기지로 삼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어 놓은 것이다.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은 암호명 ‘결호(決號)작전’으로, 홋카이도(결1호 작전), 동북(결2호 작전), 관동(결3호 작전), 동해(결4호 작전), 중부(결5호 작전), 규슈(결6호 작전)와 함께 제주도는 결7호 작전의 무대가 됐다.
오키나와 함락 이후 미군의 주된 상륙 지점은 규슈가 될 테고, 이때 미군의 제주도 공략은 필연적인 것으로 판단됐다. 제주도가 최전선이 된 것이다.”

만일 그때 오키나와전선이 무너진 뒤에도 일본이 전쟁을 계속했다면 제주도에서 오키나와의 비극이 되풀이됐을 가능성이 높다.
7만5천의 일본군 병력이 결사항전을 위해 제주도에 들어간 것은 1944년 3월에 신설된 오키나와 수비군인 일본군 제32군이 결사항전을 위해 오키나와에 들어간 것과 같은 패턴이다.
다행히 제주도는 오키나와 같은 비극은 피할 수 있었지만, 참으로 얄궂게도 일제 패망 뒤 같은 민족이 동족을 학살한 4·3사태라는 모진 참극을 겪게 된다.

이미 그 전에 많은 조선사람들이 오키나와에서 그런 참극을 겪었다.
1945년 8월 20일, 오키나와 본섬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 떨어져 있는 섬 구메지마(久米島)에 전쟁 전부터 살고 있던 조선사람 구중회(具仲會, 일본 성 다니카와 谷川)씨 일가족 7명이 근거도 없이 미군과 내통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 손에 학살당했다.
오키나와 여성과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고 살던 구씨 일가족은 이미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투항하지 않고 있던 일본군 손에 참혹하게 당했다.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있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에 가면 <오키나와전도(戰圖)>라는 가로 8m, 세로 5m짜리 수묵채색화 대작이 한쪽 벽면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과 난징 대학살, 아우슈비츠 참극을 그린 화가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마루키 도시(俊)가 함께 그린 이 대작은 바로 집단자살 등 가마 속에서 자행된 오키나와 주민 학살 참극을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 이 구메지마의 조선인 일가족 학살 장면도 들어 있다.
구씨가 나무에 매단 밧줄에 목이 매여 죽은 채 누워 있고 어린 아들이 그의 몸을 안고 울고 있다. 그 옆에는 그들 가족이 일본군 총칼에 학살당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집단자결은 학살이다
사키마 미술관

사키마 미술관 <오키나와전도> 도록 첫머리에는 두 화가가 쓴 같은 제목의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부끄러운 짓 당하기 전에 죽어라
수류탄을 주세요
낫과 괭이 면도칼로 해라
어버이는 자식을 남편은 아내를
젊은이는 노인을
에메랄드 바다는 핏빛으로
집단자결이란
스스로 한 게 아닌 학살이다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있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있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
16일 찾아간 사키마 미술관에는 오키나와에 수학여행 온 것으로 보이는 40명쯤 되는 교복 차림의 중고생들이 <오키나와전도> 앞에 앉아 있었고, 사키마 미치오(道夫) 관장이 그들 앞에 서서 그림을 설명하면서 오키나와전, 그리고 전쟁의 의미에 대해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사키마 관장은 후텐마에 땅을 많이 갖고 있던 아버지 덕에 미군으로부터 군용지료를 받아 부자가 된 사람인데, 일찍이 본토에 유학 가 공부하면서 오키나와가 겪은 비참한 전쟁 체험을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는 본토인들의 오키나와 출신자들에 대한 편견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그가 마루키 부부의 대작 전시하기 위해, 후텐마 기지 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 일부를 군용지 계약 갱신 때 돌려받아 미술관을 지었다.
오키나와 평화학습의 명소가 된 사키마 미술관에는 매년 4만명 정도가 찾아간다.
사진가 정주하씨가 원전사고 이후의 황량한 후쿠시마 인근 지역을 찍은 사진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판화가 홍성담씨의 작품 해설이 담긴 팸플릿들도 전시돼 있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설명이 끝난 뒤 큐레이터 우에마 가나에(上間かな惠)씨로부터 그림 설명을 듣고 있는 나를 만나러 온 사키마씨와 인사를 나눴다.

구씨 일가 7명의 이름은 24만의 희생자들을 검은 비석들에 새겨 놓은, 이토만시와 인근 시마지리군에 걸쳐 있는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내의 평화의 비(平和の礎, 1995년 건립)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구씨 집안이 아니라 일본명인 다니카와(谷川)씨 일가 이름으로 돼 있고, 한국과 북한 희생자들 이름이 새겨진 비석 구역이 아니라 오키나와 희생자비 구역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 중의 하나인 기노완의 가카즈(嘉数)구릉 위에는 군부로 끌려가 탄약 운반, 진지 구축, ‘인간폭탄’으로 희생당한 조선사람 386명을 추모하는 ‘청구의 탑’이 세워져 있다.

미군과 내통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 손에 학살당한 조선사람 구중회(具仲會, 일본 성 다니카와 谷川)씨 일가족 7명의 이름이 새겨진 평화기념공원 내 비석. 다니카와라는 성으로 조선인 구역 비석이 아니라 오키나와인 구역 비석에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 다니카와(谷川) 일족 7명의 이름이 보인다.
미군과 내통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 손에 학살당한 조선사람 구중회(具仲會, 일본 성 다니카와 谷川)씨 일가족 7명의 이름이 새겨진 평화기념공원 내 비석. 다니카와라는 성으로 조선인 구역 비석이 아니라 오키나와인 구역 비석에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 다니카와(谷川) 일족 7명의 이름이 보인다.
게라마제도의 도카시키(渡嘉敷)섬에서는 전쟁 말기에 조선인들의 미군 투항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토벌대를 편성해 많은 조선인들을 살해했다.
게라마에는 조선인 군부 약 1천명과 위안부로 끌려간 어린 조선인 여성 21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 중 군부 수백명과 위안부 4명이 그렇게 희생당한 사실을 기록한 ‘아리랑의 비’가 도카시키에 세워져 있다.
도카시키에만 200여명의 조선인 군부, 7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가 있었다고 한다.

자마미와 아카 섬 조선인 성노예

게라마 제도 내의 자마미섬과 아카(阿嘉)섬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7명씩 한 조로 투입이 됐고, 조선인 군부들이 자마미에 300명, 아카에 350명이 배속돼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전쟁 말기에 주민과 병사들을 집단자결, 옥쇄로 몰아간 일본군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아카섬에서는 1945년 2월 조선인 군부들로 짜인 수상근무대가 투입됐는데, 일본군이 이들 조선인들을 특히 심하게 차별해 식량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해 4월 7명의 조선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갔다가 발견돼 처형당했고 나머지 조선인 군부들이 30~40명씩 좁은 굴 속에 유폐됐다. 일본군은 그들에게 용변을 보는 경우를 빼고는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적어도 12명의 조선인 군부들이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차탄의 가데나 지역에는 위안소와 이들의 정기검진을 위한 병원이 있었다.
거기에 “나이 16~17살로 일본 이름으로 불리던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는데, 일본 헌병들이 그들 중 한 명을 ‘마치 동물을 다루듯 난폭하게’ 대하면서 ‘두들겨 팬’ 뒤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130여개에 달했던 오키나와 위안소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던 소리

위안소는 오키나와에만 130여개 곳이 설치됐다.
거기에는 오키나와 여성과 일본 여성들도 위안부로 와 있었지만 대부분 10대 20대의 키가 크고 피부도 하앴다고 주민들이 기억하는 조선인 여성들로 채워졌다.
먼 섬 구석구석까지 설치된 위안소 130여 개에 조선인 위안부들이 7명씩 배치됐다면, 그 수는 1천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산된다.
“도카시키 섬에서 일본군은 주둔을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거기에 보내진 7명의 조선인 여성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아키코(한국명 배봉기 裵奉奇, 30), 기쿠마루(28), 가즈코(23), 하루에(또는 하루코, 23), 스즈란(20), 아이코(16), 미짱(16) 등 모두 일본명으로 불렸는데, 가네코라는 조선인 남성이 관리하고 있었다. (…)
설날 접대주를 마시고 취한 그들이 미친 듯이 ‘아이고~! 아이고~!’하며 울부짖던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위안부의 비극과 고통을 알게 됐다.”(<군대는 여성을 지켜주지 않는다>)

배봉기 할머니=아키코의 한많은 일생

배봉기 할머니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기구하다.
1945년 3월 23일 위안소가 미군 폭격으로 파괴돼 함께 있던 하루에가 죽었다.
미군이 상륙한 뒤 산 속에 진을 친 일본군을 따라간 그들은 취사반 역할을 했지만 먹을 게 없어 굶다시피 했다. 그해 8월 26일 그곳 일본군이 무장해제된 뒤 미군에 의해 오키나와 이시카와 수용소로 보내졌다.
함께 간 가즈코는 조선인 남성과 살림을 차렸으나, 아는 사람도 돈도 없었던 데다 일본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배 할머니는 1년여 만에 술집 취객을 상대로 몸을 팔 수밖에 없었다.
미군도 일본 당국도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인 귀환자들을 태우고 가는 배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온몸이 망가진 배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생활보호자 인정을 받으려 했을 때 호적이 문제가 됐다. 그는 존재했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생활보호는커녕 강제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딱한 사정이 알려지면서 주위사람들 도움으로 특별체류허가가 내려졌고 그 때문에 그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배봉기라는 이름도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무렵 배봉기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본 주간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신례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벽면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배 할머니는 당시 고향에 같이 가자는 일본 기자들의 제안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무렵 배봉기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본 주간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신례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벽면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배 할머니는 당시 고향에 같이 가자는 일본 기자들의 제안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김현옥이라는 조선사람 부부가 그를 많이 도와줬는데, 그들이 민단이 아니라 총련 소속이어서 배 할머니는 이후 한국 정부나 그곳 한국영사관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실은 배봉기 할머니의 출현으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으나,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받은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위안부 문제 자체가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지 못했다.
총련 소속 조선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배 할머니는 이중삼중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1991년 10월 세상을 떠난 배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며 귀향을 권하는 주위사람들 얘기에 이렇게 말했다.
“고향에 돌아간 꿈을 꿀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지금 돌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꼬….”

조선인 성노예들은 한 사람당 매일 10~2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겨우 3, 4분 만에 차례가 된 자가 잇따라 들어갔다”는 증언도 있다.
위안부들은 항상 굶주려 근처 주민들 집에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는 모습도 목격됐다고 한다.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을 출신지별로 차별대우해 장교 전용 위안소에는 규슈나 오키나와 출신 위안부를 배치했다.
그들은 식사 대접도 받고 깨끗한 옷을 입었으며, 때로는 외출까지 할 수 있어서 조선인 위안부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군대는 여성을 지켜주지 않는다>)

오키나와에서만 1천명이 넘었던 조선인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1천명 이상의 10대, 20대 조선 여성들을 비롯해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오키나와 연행 조선인들 중 희생자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으나 평화의 비에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이라 새겨진 비석에 올라 있는 희생자는 441명밖에 안 된다.
확인되는 대로 계속 추가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묘역에 준비돼 있는 비석들 다수는 아직 아무 이름도 없는 빈 비석으로 남아 있다.
그 옆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비석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수십 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북한 비석에는 대만인 희생자들 이름이 옆에 새겨져 있다.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비석을 쓰는 것이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평화의 초석 석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평화의 초석 석비.

평화기념공원 내 비석들 가운데 추가로 확인된 한국 국적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추가로 확인돼 새겼다는 문구가 보인다. 그 오른쪽은 앞으로 추가 확인될 수 있는 희생자들을 대비해 세워놓은, 아직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들.
평화기념공원 내 비석들 가운데 추가로 확인된 한국 국적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추가로 확인돼 새겼다는 문구가 보인다. 그 오른쪽은 앞으로 추가 확인될 수 있는 희생자들을 대비해 세워놓은, 아직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들.
조선사람 희생자가 이처럼 얼마 되지 않는 것은 실제 희생자들이 적어서가 아니라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평화의 비 건립자 쪽도 앞으로 확인될지도 모를 조선사람 희생자들 추가 각자에 대비한 것인지 이름을 새기지 않은 빈 비석들을 같은 구역에 죽 세워 놓았다.
확인이 되지 않는 것은 주로 전후 일본 당국의 조선사람 희생자들에 대한 외면, 무시 때문이지만, 위안부로 끌려온 희생자들의 경우 유족들이 비석에 등재하기를 거부하는 등 여러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전시에 일본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많은 조선사람 희생자들이 일본사람으로 오인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도 지금까지 오키나와인이나 일본인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4.
뿌리깊은 오키나와의 슬픔

전전상태 복제된 전후 일본

2007년 9월 오키나와 주민 11만6000여명이 집단시위를 벌인 것은 일본 문부과학성(교육부)이 고교 교과서에 기술돼 있던 이 집단자결 사실을 2008년도부터 사용하게 될 교과서에서 삭제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집단자결이 일본군의 명령에 따른 게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당시 일부 군 간부들이 소송을 내자 그것을 구실로 삭제를 지시했다.
1995년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때 폭발했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가 그때 또 다시 크게 폭발했다.
재판은 결국 원고들 패소, 즉 당시의 집단자결이 명령에 따른 게 아니었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판결로 귀착됐지만, 그럼에도 문부과학성은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지 않은 채 여전히 삭제한 상태로 두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피해의식과 중앙정부 또는 본토인들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 때 주민들은 미군에 대한 공포도 컸지만 당시 “미군보다 일본군이 더 무섭다”는 말이 돌 정도로 일본군을 더 두려워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집단자결을 강요한 원인으로는 △일본군 자신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포로가 되거나 해서 그 내부 사정이 누설되는 걸 막기 위해서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모두 스파이”라고 했을 정도로 주민들에 대한 일본군의 차별과 불신 △잔일과 심부름을 해주고 식량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주민들의 이탈을 막기 위한 것 등이 거론되고 있다.
공포에 떨던 주민들은 전쟁터에 나가 죽거나(전사), 미군의 포로가 되거나, 일본군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자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2차대전 중에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대규모 지상전인 오키나와 전투는 처음부터 일본 지배세력이 본토 방어와 체제 유지를 위한 시간벌기용으로 기획된 전쟁이었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 기획에 소모품으로 동원됐다.

“오키나와전은 ‘본토 결전’의 시간을 벌고, 잘 되면 ‘국체호지(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연합군과 평화(항복)교섭’을 벌이기 위한 ‘버리는 돌(捨石) 작전’이었기 때문이다.”(<오키나와 현대사>)
일왕 히로히토와 일본 대본영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 시작된 4월 전 또는 최후결전이 벌어진 6월 전에 항복을 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키나와에서 죽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후 일본 처리 문제가 논의된 1945년 7월 포츠담선언 때라도 전쟁을 포기했다면 나가사키·히로시마 원폭의 비극은 없었을지 모르고, 소련군의 대일전 개입도 없었고, 따라서 미군이 서둘러 한반도를 분단하지도, 한국전쟁(6·25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본 대본영이 오키나와 ‘버리는 돌’ 작전을 벌이며 연합군으로부터 천황제 유지 즉 국체호지 보장을 받아내려 시간벌기를 한 대가는 너무 컸다.

그들은 그 많은 목숨을 희생시킨 대가로 결국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제 패전 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천황제를 존속시켰고 군대를 부활시켰으며, 한때 공직에서 추방하거나 일부 중형에 처했던 A급 전범들(그들 중엔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도 포함된다)도 복귀시켰다.
중국이 미국 예상과는 달리 공산화하고 한국에서 대규모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일본 점령계획을 180도로 바꿔 군국일본의 직계후예들을 다시 등용한다.
그들에게 전후 일본의 운영을 맡기고, 그들이 주도한 냉전체제의 동아시아 반공보루로 일본을 육성하기 위해 전쟁범죄자들과 그 주변세력을 중용하고 지원했다.
이미 미군 점령 초기에 히로히토는 자기 측근을 통해 천황제 유지, 즉 자신의 목숨과 지위 보전을 조건으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미군의 일본 장기 주둔 보장을 약속했다.
특히 1951년에 체결되고 그 다음해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 일본 보수 지배자들은 오키나와 주민들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본 주권 보전을 전제로 미군에게 시정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오키나와를 사실상 미국 영토로 할양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반환’한 것은 1972년이다.
그때도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 의사를 물어본 적이 없으며, ‘반환’ 이후에도 미군 기지는 그대로 유지되거나 더욱 확대됐다.

오키나와 헤노코 바다에서 본 캠프 슈와브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오키나와 헤노코 바다에서 본 캠프 슈와브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독립 류큐의 꿈

오키나와의 슬픔은 뿌리가 깊었다.
아울러 ‘류큐 공화주의사회’ 건설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오키나와인들의 탈일본 움직임의 뿌리 또한 생각보다 깊었다.
오키나와는 1872년 일본의 한 현으로 재편될 때까지 500년간 독립된 류큐왕국으로 존재했고, 고려시대 때부터 한반도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오키나와인들이 다시 과거 왕국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지금 다시 자립적인 공동체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별적인 일본 본토에 대한 반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와 세상 자체가 탈근대 쪽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키나와를 규정해 온 근대적 가치와 기준이 허물어지고 있는 데 따른 현상일 수 있는 것이다.
19일, 2시간이면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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