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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05-28 21:15수정 :2015-05-29 09:53
2004년 평양에 갔을 때 만난 리찬복 북한 중장과 함께선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 판문점이 속한 비무장지대(DMZ) 중앙지역 책임을 맡고 있는 리 중장은 처음엔 “여기는 뭐 하러 왔소?”라며 적대감을 보였으나 헤어질 때는 그레그 대사의 손을 잡고 와줘서 고맙다며 다시 찾아와달라고 초청까지 했다. 창비 제공
2004년 평양에 갔을 때 만난 리찬복 북한 중장과 함께선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 판문점이 속한 비무장지대(DMZ) 중앙지역 책임을 맡고 있는 리 중장은 처음엔 “여기는 뭐 하러 왔소?”라며 적대감을 보였으나 헤어질 때는 그레그 대사의 손을 잡고 와줘서 고맙다며 다시 찾아와달라고 초청까지 했다. 창비 제공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베트남·소련 등 실패 사례 들어
북한 악마화 정책 중단 촉구
남북 화해 분위기 여러차례 뒤엎은
딕 체니 등 미국 매파들의 강경책은
미국내 정치적 이득 얻으려는 행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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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파편들-
도널드 그레그 회고록

도널드 그레그 지음, 차미례 옮김
창비·2만5000원


5월19일 서울에서 열린 <역사의 파편들> 한글판 출간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 지은이 도널드 그레그(88) 전 주한 미국대사(1989~93년)는 “북한을 악마화하지 마라”는 얘기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적대국에 대한 ‘악마화 전략’으로 미국이 중대한 타격을 입은 대표적인 안보·군사적 실패 사례를 들면서 북한과 베트남, 이라크, 러시아 등을 거론했다. 한국지국장 근무(1973~75년)를 포함해서 1950년대 초부터 31년간 중앙정보국(CIA)에 몸담았던 그레그 전 대사는 “우리가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나 집단을 무조건 악마화하려드는 경향”이 무지와 편견을 낳고 그것이 악선전과 선동정치의 증폭과정을 거쳐 적뿐만 아니라 미국 자신도 끊임없이 곤경에 몰아넣고 있다고 했다.


그레그 대사는 어린 시절 회상부터 최근의 북한방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증언들을 담고 있는 이 흥미진진한 회고록의 마지막 장 제목을 ‘악마화가 부르는 위험’이라 달았다. 바로 그 뒤에 붙인 후기에서도 악마화를 그만두고 대화를 하라고 촉구한다. 누구와? 바로 북한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끝낼 수 있고 또 반드시 끝내야 하는 비극이다. 그것은 서로 계속하고 있는 악마화가 대화로 바뀌고 화해가 이뤄질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90을 바라보는 이 ‘노인’의 간곡한 얘기에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가 한줄로 꿰어놓은 미국의 과오들에 대한 기억, 그 ‘악마화’의 파편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 얼마나 될까.


그레그 대사가 초보 시절 겪은 CIA 간부들은 당시 적대국인 소련 정보원들의 지적 능력을 깔봤을 뿐 아니라 CIA 내부에 소련 스파이들이 대거 침투해 있다는 오판과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레그는 그런 ‘소련 악마화’ 때문에 방첩 개념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숱한 미국 첩보작전이 실패하고 많은 요원들이 목숨을 잃었다면서 이중간첩 올드리치 에임스의 반역사건 피해가 커진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더 민감한 문제는 베트남과 그 지도자 호치민에 대한 악마화가 부른 결과다. 2차대전 뒤 호치민은 여러차례 미국에 손을 내밀었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1972년에야 기밀해제)까지 보냈다. 미국은 통일독립국가를 추구한 이 베트남 민족주의자의 요청을 거부했고, 마오쩌둥의 중국과 한패인 공산주의 악마로 몰아갔다. 그건 미국과 프랑스간 거래의 연장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식민지를 재건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고, 이미 냉전으로 가고 있던 미국은 친미 반소 서유럽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연합의 모태) 결성 공작에 개입하고 있었다. 미국은 프랑스가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가입하는 대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재건을 지원했다.


지난 5월1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역사의 파편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때의 그레그 전 대사. 창비 제공
지난 5월1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역사의 파편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때의 그레그 전 대사. 창비 제공


하지만 프랑스는 다엔 비엔 푸 전투에서 패배했다. 프랑스 지배는 끝났지만 베트남은 분단당했고 미국이 프랑스를 대신해 본격 개입한다. 그레그 대사에 따르면 미국은 그때 호치민 뒤에 중국이 있다고 오판했다. 그레그가 혐오한 미 공군 장성 커티스 르메이는 당시 북 베트남을 폭격해 배후세력인 중국을 더 깊숙이 전쟁에 끌어들인 다음 중국의 핵무기 제조시설들을 폭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북폭으로 “24시간 만에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MACV)의 폴 하킨스 사령관은 “우리는 6개월이면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이곳을 벗어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미국은 50만 미군을 파병하고도 졌다.

 

그레그 대사는 미국의 이른바 “한반도문제 전문가”라는 사람들 다수가 지금 르메이나 하킨스와 같은 시각으로 북한을 악마화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한반도전쟁 직전까지 갔던 1994년의 ‘제1차 북핵위기’도 그런 사람들이 촉발시켰다. ‘1987년 체제’ 성립으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덕에 한국은 러시아 등 사회주의권과 급속히 관계정상화를 이룩했고 남북관계도 풀려 1991년에는 남쪽이 핵무기 철수를 선언했다. 화해·상호불가침·교류협력을 명기한 ‘남북기본합의서’까지 발표했고 남북 총리회담도 8차례나 열렸다. 그레그 대사는 로버트 리스카시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과 함께 미 국방부를 설득해 한미 팀스피릿 훈련(1992년도 훈련)을 취소하기로 발표한 것도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썼다.


이 화해무드를 일거에 뒤엎어버린 것이 1992년 가을 딕 체니 당시 미 국방장관의 팀스피릿 훈련의 1993년 재개 선언이었다. 체니는 국무부나 그레그 대사와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미국 대통령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었고, 체니는 북을 악마로 몰아 남북긴장을 조성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어내려 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합중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것은 딕 체니가 나중에 부통령이 된 다음에 남북한 화해를 향한 어떤 움직임도 철저히 무력화시키려고 취한 몇가지 파괴적인 조치 중 첫번째에 불과했다.”


북은 팀스피릿 재개를 비난하면서 준전시체제를 선언했다. 1993년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핵개발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중단시킬 수 있었던 클린턴 정부의 제네바 북미 핵합의는 바로 그해 공화당의 중간선거 승리, 그 뒤의 대북 중유 제공합의 파기로 다시 파산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과 그 뒤 조명록 북 차수가 워싱턴으로 가 클린턴 대통령을 북에 초청하고 메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지금의 미-쿠바, 미-이란 화해를 선취했던 북-미 접근도 체니가 부통령으로 미국의 안보군사정책을 좌우했던 조지 부시 정권의 등장으로 또 파산했다.


그렇다. 문제는 미국이다. <역사의 파편들>을 보면 남북대결의 비극 뒤에는 늘 미국이 있다. 이건 반미주의자나 종북주의자의 얘기가 아니라 미국과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전 주한 미국대사의 얘기다. 체니 등 매파들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도 거짓 구실로 악마화하면서 무력으로 무너뜨렸지만, 미국은 거기서도 실패했다. 그레그는 ‘악마화’가 미국이 겨냥한 적대국들을 곤경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 자신의 실패로도 귀결됐다며 “악마화를 그만두라”고 외친다. 그의 외침은 CIA의 아시아 정세 분석관으로 오래 일하다 만년에 미국의 군사제국주의 비판자로 돌아선 찰머스 존슨의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그레그 대사는 천안함 침몰이 북의 소행일 가능성이 없다는 자신의 공개적 주장을 다시 펼치진 않았지만, 그 생각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방북까지 모두 여섯차례 평양에 간 그레그가 제시하는 대안적 해법은 대화와 건설적인 관여다. 우리사회 일부에서는 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권고마저 ‘친북·종북’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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