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03 21:45:42수정 : 2015-07-03 21:55:17

일반
치유를 위한 기억
글 박은하·사진 서성일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3·1, 4·19, 5·18, 6·10, 6·25, 8·15…. 한국인의 달력은 기념해야 할 날들로 가득 차 있다. 생일·결혼기념일 등 개인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날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기념해야 할 날이 거의 달마다 이어진다. 하지만 기념일이 많다고 한국사회를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던진 의문부호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이 ‘망각사회’라는 점을 일깨웠다. “달라진 것이 없다”는 분노는 “잊지 말자”는 다짐으로, 다짐은 “기억하자”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기억’의 위상이 변하고 있다. 기억이 고통을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강조된다. ‘개개인의 기억’ 역시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며, ‘사회적 기억’을 통해 공공선과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의식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참사 이전부터 기억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오던 사람들이 있어 가능했다.


■ 시민의 기억이 역사다… 서울시 기억수집가

지난해 서울시 기억수집가로 활동한 박현숙씨도 기억을 세우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박씨는 서울문화재단 ‘메모리인(人) 서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활동했던 119 구조대원 김명완씨(49)가 겪었던 ‘참사의 기억’을 인터뷰하고 채록했다. 건물 잔해에 깔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비규환의 광경, 목숨을 걸고 벌였던 구조과정, 구조작업이 끝난 뒤에도 몇 달 동안 환청과 이명에 시달려야 했던 김씨의 경험은 모두 ‘기억’해야 할 것들이었다. 김씨가 목격한 당시 언론들의 지나친 취재경쟁, 시민들의 자원봉사활동 등 미담도 끄집어내 고스란히 육성으로 녹음했다.

서울시는 2013년부터 시민 기록수집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에 대한 ‘시민들의 기억’을 모으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는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시장 일대(추억), 2002년 한·일 월드컵(환희), 삼풍백화점 사고(아픔) 등 3가지 주제로 수집활동을 진행했다. 현재까지 시민 846명이 참여해 에피소드 1369개를 모았다. 조선희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기억수집가는 역사책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가치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기록수집단이 채록한 육성 인터뷰는 ‘메모리인(人) 서울’ 프로젝트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삼풍백화점 사고와 같은 굵직한 사건이 아닌 개개인이 목격한 단상과 추억의 편린들이 수집 대상이다.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맞추면 새로운 서울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해방 직후 종로에는 정치적으로 아주 시끄러웠어. 정치깡패들이 많이 설쳐댔지.”(김철식), “1960년대 대입 재수를 위해 서울에 왔는데, 학생이 보통 많았던 것이 아니었어. 60명이던 학원 강의실이 꽉 차서 서서 들었어.”(남일현)

에피소드는 역사연구자료나 소설·영화 등의 소재로도 쓰인다. 무엇보다 서로 기억을 끄집어내고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시민 간 유대감이 두터워진다. 태지호 영남대 사학과 교수는 “공동체란 곧 ‘나와 같은 기억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자신의 기억을 말하는 행위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사회적 행위”라고 말했다.

참사나 사고 등으로 상처 입은 이웃의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416기억저장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월호·밀양 송전탑 등 사회적 이슈도 ‘국가폭력’ 등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구술 등을 통해 개개인의 생생한 실존적 고통을 직시하고 사회적 기억으로 공유해 나가야 치유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가족, 연구자, 시민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416기억저장소는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유가족들의 경험과 생각 등을 기록하고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공동체’와 ‘삶의 민주주의’로 기억한 광주 광산구 ‘행복박람회’. | 광산구청 제공


■ 5·18과 행복, 공존할 수 있다

“광주 여성분들이 커다란 솥단지를 걸어놓고 주먹밥을 만드는 모습입니다. 항쟁 당시 광주 시내 중심가 각 동에서는 쌀과 김, 김치와 꼬깃꼬깃한 현금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옆 동네에서 더 많이 내려고 경쟁이 붙기도 했습니다.”

지난 5월18일 광주 광산구를 방문한 시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계엄군의 시민 학살 등 악몽이 먼저 떠오르는 5·18이지만, 이날 방문자들은 “자식 같은 이웃”을 위해 앞다퉈 주먹밥을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속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보았다. ‘5·18’과 ‘행복’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하지만 광산구는 5·18 기념행사로 시민과 함께하는 ‘행복박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밥을 짓고, 시신을 거두고, 헌혈을 했던 현장들을 둘러봤다. 역사적 기념일을 기억하는 방식에 조용한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행복박람회’는 “5·18 항쟁은 국민 모두가 기념하는 기념일로 자리 잡았지만 어딘가 부족하고 허전했다”는 광주시민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항쟁’만 기억했지 5·18의 또 다른 축이자 오늘날 민주주의의 원리를 지탱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억은 소홀했다는 반성이다. 민형배 구청장은 “교육감 직선제, 무상급식, 지방자치제 안에 공동체의 이상이 담겨 있지만 광주시민들은 ‘위로부터의 정책 결과물’로 여기지 스스로 쟁취한 민주주의라는 생각은 잘 안 한다. ‘자치공동체’로서의 광주를 기억하는 것이 나눔, 연대, 숙의민주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 구청장은 “5·18은 과거를 기억하는 날일뿐만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날로 의미가 넓어질 것”이라 말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6월에 청소년 사회참여 발표대회를 열었다. 주제는 1987년 6월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다. 귀가 시 치안문제, 버스 성형광고, 청소년들의 행복한 알바, 햄버거 식품첨가물 표시 등 다양한 생활의제들에 대한 청소년들의 생각과 참여활동 내용이 발표된다. 현실 문제에 대해 청소년들이 다양하게 참여하고 토론하도록 하는 것이 ‘6월 민주화’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한다는 취지에서다.

4·19혁명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도 진행 중이다. 추진위원회는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대 전 기간은 세계적으로 학생혁명의 계절이었다. 후진국의 고민에서 출발해 독재정권을 타도한 4·19는 일본의 미·일안보조약 비준 반대시위, 터키의 반정부시위 연대로 강화됐고 도미노로 영향을 줬다”며 등재 추진 이유를 밝혔다.

4·19혁명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위원회. 정지윤 기자


■ 기억은 공공재… 국가차원 진상규명과 사과

‘밝음’뿐 아니라 ‘어둠’과 ‘고통’에 대한 기억 역시 계속돼야 한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경우 진상이 밝혀지고 국가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이 치유의 근본 전제이며 진정한 기억이다. 국가에 의한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이야말로 ‘고통’을 해소하는 첫 단계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활동이 대표적이다. 위원회는 현대사 전반의 반민주적·반인권적 사건 등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2005년 5월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2005년 12월1일부터 2006년 11월30일까지 1년 동안 1만860건의 진실규명사건이 신청됐다. 2006년 4월25일 첫 조사를 개시하여 2010년 6월30일까지 약 4년2개월 만에 조사가 마무리됐다.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유해발굴 작업도 이뤄졌다. 진도 어부 간첩단 사건(1980), 인혁당 사건(1974) 등이 국가에 의한 조작사건으로 밝혀졌다. 국가에 의한 폭력사건으로 밝혀질 경우 국가의 사과와 배상도 권고했다. 하지만 활동이 2010년에 종결되고 후속 활동이 이뤄지지 못해 한계를 드러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작사건’으로 결론짓고 재심을 권고, 지난 6월에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하지만 수사 검사였던 남기춘 변호사는 “사과할 일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한 판결도 지금의 잣대로 하면 결론이 달라지는 게 많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수사 검사였던 임철 변호사도 “검찰은 수사를 하는 기관이지 판단을 하는 기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과거사 청산은 몇 년간 보고서 내지 조사 작업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기억을 공공재로 축적하는데 익숙하지 않고, 레드콤플렉스 등으로 피해자들이 자신의 기억을 남에게 말해본 경험 없이 오랫동안 억압돼 왔다. 민간재단 등의 형태로 기억을 지속적으로 축적해 피해자와 이후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하며 조작·은폐된 국가폭력 사건을 파헤쳐 재심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이끌어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기억의 조건 - 공감과 경청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과 사과 요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청과 공감을 주문한다. 김익한 교수는 “한국사회는 자신의 이념과 주장을 말하고 규정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들어주는 경험은 익숙하지 않다”며 “피해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가만히 들으며 실존적 고통을 응시하면서 기억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독일이 홀로코스트 기억에 나선 이유는 나치 전범자들을 다 잡아들였음에도 10~20년이 지나도록 유대인들이 계속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독일·미국 등 전 세계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 <안네의 일기> 등이 재조명되고, 피해자에 대한 동일시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치유될 수 있었다”며 “결국 기억을 통한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갈등이 해소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4·3사건 피해자들에게 국가를 대표해 사과했다.

태지호 교수는 “한국은 한편으로는 과잉기억사회다. ‘기억하라’는 외침은 있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기억할지는 망각한다”고 말했다. 태 교수는 “미국에서 9·11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으며 기념관·동상 등 아이디어가 제시됐지만 땅만 파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라운드 제로’ 방식이 채택됐다. 빈 공간을 보면서 각자가 이슈에 대해 생각하게끔 했다”며 “기억의 궁극적 목표는 숭고함이다. 세월호 등도 보상 프레임에 매몰되지 말고 원래 우리 사회가 지향했어야 할 가치를 성찰하며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