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ressEngine ver.2

글 수 444
  등록 :2015-07-10 19:47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푸른숲, 2005
친구가 꽃을 보내주었다. 택배 상자를 여니, 황홀한 카드와 제철 꽃다발이 물 스펀지 속에서도 싱싱했다. 의전용을 제외하면 평생 처음 받아본다. 고맙고 놀랍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연애하면 이런 거 받는 거야?” 전화했더니, “나도 못 받아봤어, 받는 거 포기하는 대신 남한테 보내자 싶어서 주소 아는 너한테 보낸 거야”. 남자에게 받는 꽃다발. 이성애의 문화적 각본을 비판하지만, 그 각본도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가 보다. 아, 나와 내 친구만 그런가?

꽃다발에서 비약해보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있다. 타인의 이해와 수용의 말마디만 있다면 죽지 않고 삶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없다. 자살이 발생할 수 있는 순간이다. 사랑은 ‘오는 것’이기에 공평하지 않다. 애걸이든 강요든 노력이든,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어떤 사람이 나보다 더 절절한 심정으로 눈물이 뒤범벅된 채 “내 목숨을 다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아무에게라도 목숨을 바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도반(道伴), 공지영.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1989)부터 그의 독자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은 서사와 구조가 다 좋지만 읽기 쉽지는 않다. 10년 전, 나는 엉엉 울면서 읽었다.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내게는 가난하고 사랑받지 못한 한 인간이 우주에 잠깐 머물다 간 이야기다. 윤수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중산층 빼고는 상황이 비슷한 여자 주인공 유정보다, 강간 살인 용의자 윤수와 동일시하며 읽었다.

내가 이 작품에서 느끼고 배운 장면들. 범죄와 계급, 굶주림, 어린이가 당하는 폭력, 성폭력 당하면서 형을 찾는 소년의 비명, 너무나 이해받고 싶지만 포기와 갈망의 반복,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이 먼저 열어주었으면 하는 심정, “내가 이런 사람인데도 얘기하고 싶냐”는 반항,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이들이 상처 하나로 서로를 수용하는 기적, 살인과 자살 충동 그 사이에서 자포자기의 시간을 견디는 것, 내가 죽는 날짜를 정확히 아는 삶….

사형 집행 전, 윤수는 편지를 남긴다. “혹여 허락하신다면, 말하고 싶다고…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내 목숨을 다해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입으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 을 꼭 하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입니다.”(290쪽) 이 사람은 말하는데 왜 이토록 많은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여러 가지 눈물이 있다. 물기, 흐름, 통곡… 만일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구절이 생각나고 서러움의 눈물이 쏟아지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강한 사람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받고 싶지만 포기했고 대신 마음 놓고 줄 수라도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저 같은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 꽃다발조차 팽개치는 것 같다. “내 목숨을 다해 타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 희생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아 헤매야 하는 현실이다. 비록 나 자신을 위한 사랑일지라도, 나의 선의를 당연한 권력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행위여서 주는 것이 ‘쉽다’. 반면, 남의 마음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조금 사랑받는다 싶으면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챙길 것은 챙기고, 모욕을 주고, 자기도취로 오만하다. 사랑과 위로는 약자가 하는 일? 이것은 시대정신인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쫓겨서이든 자발적이든, 죽음의 열차를 타고 싶어 한다.(201쪽) 그래서 사형수나 자살자나 같은 처지일 수 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살아야 하는 시간이 죽을 맛이다. 내 생각에, 이 시간을 견디는 최선의 방법은 타인의 상처를 돌봄으로써 나를 위로하는 ‘대신 꽃다발’ 마음가짐이다. 나는 ‘우행시’라는 줄임말이 싫다. 행복한 시간, 이 단어가 꼭 들어가야 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데.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번호
제목
글쓴이
344 국가인권위원장이라는 자리
[관리자]
2246   2015-07-22
등록 :2015-07-21 18:40수정 :2015-07-21 21:21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파리원칙은 인권위 구성에서 다원성을 특히 강조한다.인권엔지오, 노동조합, 인권을 염려하는 사회·직능단체, 철학과 종교의 흐름, 대...  
343 [사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을 환영한다
[관리자]
2603   2015-07-16
등록 :2015-07-15 18:27 한국 현대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파괴·유린한 인물들을 기록하는 가칭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이 추진된다. 광복 이후 공직자나 공권력의 위임을 받은 자 가운데 내란·부정선거·고문 및 조작 등 반헌법 ...  
342 프란치스코 교황 “물신숭배는 ‘악마의 배설물’”
[관리자]
2234   2015-07-13
등록 :2015-07-12 15:16수정 :2015-07-12 21:19 프란치스코 교황. 한겨레 자료사진 프란치스코 교황 ‘물신숭배’ 비판 남미 순방에서 수차례 강도 높게 질타 “인간의 얼굴 가진 경제모델” 촉구 원주민에겐 식민시대 교회 잘못 ...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내 목숨을 다해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관리자]
2541   2015-07-13
등록 :2015-07-10 19:47[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푸른숲, 2005 친구가 꽃을 보내주었다. 택배 상자를 여니, 황홀한 카드와 제철 꽃다발이 물 스펀지 속에서도 싱싱했다. 의전용을 제외...  
340 미국 청소년들 광주서 ‘민주화’ 체험
[관리자]
2432   2015-07-12
등록 :2015-07-09 20:15 사진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중·고교 15명, ‘5·18민주묘지’ 등 방문 “민주주의에 대해 눈뜨게 해준 시간” 서울 등서 28일간 ‘평화’ 체험 행사 미국 청소년들이 국립5·18민주묘지와 금남로 ...  
339 구세주의 배신
[관리자]
2321   2015-07-10
조현 2015. 07. 08 미국 연방대법원이 6월26일 동성결혼이 헌법적 기본권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 백악관은 외벽에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색 조명을 밝히며 환영했다. 페이스북 이용자 2600만여 명도 자신의 프로필...  
338 [스브스뉴스]한 서린 역사..소름 돋는 '지옥 섬'을 아십니까
[관리자]
4158   2015-07-04
SBS | 권영인 기자 | 입력 2015.07.03. 19:09 ☞ SBS뉴스로 오시면 '[SBS 슬라이드 형태]'로 보실 수 있습니다. "관광하던 중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 - 핀란드에서 온 관광객 -...  
337 치유를 위한 기억
[관리자]
3357   2015-07-04
입력 : 2015-07-03 21:45:42ㅣ수정 : 2015-07-03 21:55:17 일반 치유를 위한 기억글 박은하·사진 서성일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3·1, 4·19, 5·18, 6·10, 6·25, 8·15…. 한국인의 달력은 기념해야 할 날들로 가득 차 있다...  
336 노부부의 죽음 유가족의 절규 “국가가 살인한 거다”
[관리자]
2626   2015-06-22
메르스로 희생된 부부의 유가족 단독 인터뷰와 의무기록 분석 기저질환 없는데도 결국 사망… 정부는 거짓말 일삼고 화장 부추기기만제1067호 2015.06.22 등록 : 2015-06-22 09:13 수정 : 2015-06-22 09:21 6월19일 대전 유성구 ㄱ...  
335 5·18 때 강제연행·구금…611명 보상 길 열렸다
[관리자]
2225   2015-06-22
등록 :2015-06-21 20:26수정 :2015-06-21 20:43 그해 5월의 광주 :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나경택 신고기간 늘린 개정안 입법 예고 35년만에…9월부터 신청 가능 5·18...  
334 [사설] 어떻게든 세월호 지우려는 경찰의 압수수색
[관리자]
2229   2015-06-22
등록 :2015-06-21 18:44 경찰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4·16연대) 사무실과 박래군·김혜진 운영위원의 차량, 사무실 등에 대해 19일 압수수색을 벌였다. 혐의에 견줘 과도한 압수...  
333 "방방곡곡 널려 있는 유해, 언제 발굴할 건가?"
[관리자]
3307   2015-06-19
15.06.19 10:30l최종 업데이트 15.06.19 10:31l 심규상(djsim) ▲ 1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2층 제 3 세미나실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 관련 입법과 진상규명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리...  
332 6월15일 현재 메르스 확진자 명단과 상태
[관리자]
3220   2015-06-15
등록 :2015-06-11 23:18수정 :2015-06-15 14:09 확진자 150명 중 16명 사망, 14명 퇴원, 120명 치료 중 전체 메르스 확진자 명단을 감염 장소, 나이, 성별 등의 분류별로 확인해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명단이다. 6월15일 오전...  
331 메르스 감염 예방 '9가지 개인위생 수칙'
[관리자]
2232   2015-06-08
연합뉴스 | 입력 2015.06.08. 14:46 | 수정 2015.06.08. 14:54 (서울=연합뉴스) 한지훈 기자 = 보건당국은 8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감염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개인위생 수칙을 철저히 지켜달라고 전 국민에게 거듭 당부했...  
330 차라리 혁명을 준비하렴 / 정태인
[관리자]
2307   2015-06-02
등록 :2015-06-01 18:53 아이야,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이 말밖엔 더 할 말이 없구나. 세상을 바꾸겠노라, 너희 나이에 온몸을 내던졌던 우리가,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전쟁을 겪었고 아주 ...  
329 미 MIT 교수 “한반도 사드, 중국과 무관?…미국 말 믿지 말라”
[관리자]
3433   2015-06-02
등록 :2015-06-01 01:16수정 :2015-06-01 10:13 포스톨 MIT 공대 교수. 사진 포스톨 교수 제공 미국 MD 전문가들 ‘한반도 사드’ 분석 첫 공개 시어도어 포스톨 MIT 공대 교수 인터뷰 시어도어 포스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328 ‘악마화 정책’은 성공한 적이 없다
[관리자]
2610   2015-05-29
등록 :2015-05-28 21:15수정 :2015-05-29 09:53 2004년 평양에 갔을 때 만난 리찬복 북한 중장과 함께선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 판문점이 속한 비무장지대(DMZ) 중앙지역 책임을 맡고 있는 리 중장은 처음엔 “여기는 ...  
327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노벨평화상을!”
[관리자]
2280   2015-05-28
등록 :2015-05-27 20:15 이김현숙 여성평화외교포럼 상임대표 여성평화외교포럼·여성변호사회 30일 후원잔치서 ‘공식 제안’ 추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여성평화외교포럼(여평외교·이사장 신낙균)과 한...  
326 [정석구 칼럼] 북핵은 미국의 꽃놀이패인가
[관리자]
2314   2015-05-28
등록 :2015-05-27 19:04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미 태평양사령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령부 작전국장을 맡고 있는 몽고메리 해군 소장은 “6개월마다 상황 변화를 분석해 작전설계를 바꾸고 있는데, 북한의 잠수함발사 탄도미...  
325 광화문 글판 25주년, 최고 명작은 이 글 -
[관리자]
3103   2015-05-27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오마이뉴스 | 이희훈,김경년 | 입력 2015.05.27. 21:10 | 수정 2015.05.27. 21:14 "출퇴근길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항상 읽게 돼요. 매일 똑같은 싯구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려고 노력하게 ...  

알림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