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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05-08 19:34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잊지 않겠습니다>, 4·16가족협의회·김기성·김일우 엮음
박재동 그림, 한겨레출판, 2015
모든 가족이 화목한 것은 아니다. 사고무친으로 태어난 이들도 있다. 가정의 달, 민망한 이름이다. 우리 집도 스위트 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엄마와 나는 특별했다. 내 인생은 엄마의 죽음 전후로 나뉜다. 삶의 엔진이었던 엄마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내 숨도 멈췄다. 살아갈 이유와 방향이 없다. 잃을 것도, 원하는 것도 없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엄마를 만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비교 가능한 죽음은 아니지만 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동일시하며 살았다. 그래서 가장 불편하고 이상한 말이 “잊지 않겠습니다”이다. 내 삶에 재건 가능성은 없다. 폭삭 주저앉았다. 불치병으로 엄마를 잃은 내가 이럴진대, 살릴 수 있었던 자식을 바다에 보낸 유가족들은 어떻겠는가. 매일매일 생각나는 아이들 그러나 다시 볼 수 없는 그 아이의 부재가, 어떻게 잊고 안 잊고의 문제겠는가.

<잊지 않겠습니다>는 <한겨레>에 작년 6월15일부터 세월호 추모 기획으로 연재된 학생들의 얼굴 그림과 가족들의 편지를 모은 책이다. 독자들은 매일 아침 그들과 마주했다. 한국 언론 역사에 지속적으로 거론될 만한 일이다. 글을 쓴 유가족들은 물론 박재동 화백과 김기성·김일우 기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끝까지 읽은 글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과 마주하는 초인적 인격을 발휘했고 책이 나왔다.

사실, 잊지 말아야 할 유일한 주체는 국가밖에 없다. 그들만 안 잊으면 된다. “잊지 않겠습니다”는 공무원이 월급 받고 하는 업무다. 재발 방지, 유가족 위로, 진실 규명… 국가가, 대통령이, 있는 나라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정치는 당연한 행정까지 마비시켰다.

“잊지 않겠다”는 선의의 언어지만 엉뚱한 곳을 떠돌고 있다. 유가족이 아닌 사람의 입장이다.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앞이 깜깜해지는 이 길을 어떻게 걸어 나가야 할지…”(314쪽) 김동현군 어머니의 심정은 유가족의 보편적인 상황일 것이다. 현실과 현실부정, 그리움 사이에서 몸부림칠지언정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가능하지 않다. 반대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다짐을 거듭해야만 잊지 않을 수 있다. 그것도 보장된 일은 아니다. 이미 다른 처지. “당신 아이는 살아 있잖아요”, “아이(시신)를 찾았잖아요.” 언어의 가장 큰 특징은 의미의 배타성이다. 각자의 인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 앞에서 무슨 합의가 가능하겠는가. 말마저 외로워진다.

‘잊지 않겠습니다’는 원래부터 문제적인 언설이다. 일단,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1993년 전북 부안군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292명 사망),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502명 사망),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192명 사망).(14쪽) 내가 어렸을 적 이리(익산)역 폭발 사고도 기억난다. 그 누구도 다 기억하고 살 수는 없다.

예상치 못한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사건 이후 몇 개월간 나는 계속 세월호에 대해 썼는데, 어느 날 독자 편지를 받았다. “불공평하다, 왜 세월호만 기억하냐”는 것이다. 자신은 중증 장애 아동을 키우는데 그런 부모의 고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항의’했다. 고통을 비교하는 대신 연대하자는 하나 마나 한 답장을 보냈지만 나는 깨달았다. “잊지 말자”는 일상이 고통인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배제의 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제 시간이 계속 흐를 것이다(428쪽, 박재동)”, “잊힐 것이다(430쪽, 김기성·김일우)”. “잊지 않겠습니다”보다 “잊힐 것이다”가 더 윤리적이다.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과 망각의 필연 사이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 피로 운운하는 여론이 고개를 들 것이다.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잊힐 것이라는 자각, 4·16이 이제부터 시작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보편적인 말은 없다. 어떤 이에게 착한 말이 어떤 이들에겐 비현실적이다. “잊지 않겠다”는 고통 외부의 시각이다. 기억해‘준다’가 아니라 당사자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슬픔이 일상의 일부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상실과 상실감은 인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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