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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07-10 19:47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푸른숲, 2005
친구가 꽃을 보내주었다. 택배 상자를 여니, 황홀한 카드와 제철 꽃다발이 물 스펀지 속에서도 싱싱했다. 의전용을 제외하면 평생 처음 받아본다. 고맙고 놀랍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연애하면 이런 거 받는 거야?” 전화했더니, “나도 못 받아봤어, 받는 거 포기하는 대신 남한테 보내자 싶어서 주소 아는 너한테 보낸 거야”. 남자에게 받는 꽃다발. 이성애의 문화적 각본을 비판하지만, 그 각본도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가 보다. 아, 나와 내 친구만 그런가?

꽃다발에서 비약해보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있다. 타인의 이해와 수용의 말마디만 있다면 죽지 않고 삶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없다. 자살이 발생할 수 있는 순간이다. 사랑은 ‘오는 것’이기에 공평하지 않다. 애걸이든 강요든 노력이든,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어떤 사람이 나보다 더 절절한 심정으로 눈물이 뒤범벅된 채 “내 목숨을 다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아무에게라도 목숨을 바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도반(道伴), 공지영.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1989)부터 그의 독자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은 서사와 구조가 다 좋지만 읽기 쉽지는 않다. 10년 전, 나는 엉엉 울면서 읽었다.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내게는 가난하고 사랑받지 못한 한 인간이 우주에 잠깐 머물다 간 이야기다. 윤수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중산층 빼고는 상황이 비슷한 여자 주인공 유정보다, 강간 살인 용의자 윤수와 동일시하며 읽었다.

내가 이 작품에서 느끼고 배운 장면들. 범죄와 계급, 굶주림, 어린이가 당하는 폭력, 성폭력 당하면서 형을 찾는 소년의 비명, 너무나 이해받고 싶지만 포기와 갈망의 반복,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이 먼저 열어주었으면 하는 심정, “내가 이런 사람인데도 얘기하고 싶냐”는 반항,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이들이 상처 하나로 서로를 수용하는 기적, 살인과 자살 충동 그 사이에서 자포자기의 시간을 견디는 것, 내가 죽는 날짜를 정확히 아는 삶….

사형 집행 전, 윤수는 편지를 남긴다. “혹여 허락하신다면, 말하고 싶다고…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내 목숨을 다해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입으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 을 꼭 하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입니다.”(290쪽) 이 사람은 말하는데 왜 이토록 많은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여러 가지 눈물이 있다. 물기, 흐름, 통곡… 만일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구절이 생각나고 서러움의 눈물이 쏟아지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강한 사람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받고 싶지만 포기했고 대신 마음 놓고 줄 수라도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저 같은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 꽃다발조차 팽개치는 것 같다. “내 목숨을 다해 타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 희생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아 헤매야 하는 현실이다. 비록 나 자신을 위한 사랑일지라도, 나의 선의를 당연한 권력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행위여서 주는 것이 ‘쉽다’. 반면, 남의 마음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조금 사랑받는다 싶으면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챙길 것은 챙기고, 모욕을 주고, 자기도취로 오만하다. 사랑과 위로는 약자가 하는 일? 이것은 시대정신인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쫓겨서이든 자발적이든, 죽음의 열차를 타고 싶어 한다.(201쪽) 그래서 사형수나 자살자나 같은 처지일 수 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살아야 하는 시간이 죽을 맛이다. 내 생각에, 이 시간을 견디는 최선의 방법은 타인의 상처를 돌봄으로써 나를 위로하는 ‘대신 꽃다발’ 마음가짐이다. 나는 ‘우행시’라는 줄임말이 싫다. 행복한 시간, 이 단어가 꼭 들어가야 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데.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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