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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5-21 22:23수정 :2015-05-22 10:27

 

원로여성학자 이효재 선생. 사진 제주의 소리 제공
원로여성학자 이효재 선생. 사진 제주의 소리 제공
[짬] 제주 설문대할망제 특별제관 지낸 원로여성학자 이효재 선생

“난 일흔살쯤 살 줄 알았어. 아버지보다 십년쯤만 더 살면 되겠다 싶었지. 그런데 이렇게 오래 살고 있으니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 생애 남북 통일은 아니더라도 서로 평화롭고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라도 봤으면 좋겠어. 우리 여성들이 행복해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땅의 평화와 모든 생명들을 위해 기원을 드렸어.”


지난 15일 ‘2015 설문대할망제’에서 92살 최고령으로 특별제관을 해낸 ‘한국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대모’ 이효재(한국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 선생은 “마치 내가 설문대할망이 된 것처럼 황홀했다”며 함께한 8명의 여성 제관들과 제자들에게 두 팔로 ‘하트’를 지어 보였다.


제주시 조천읍 제주돌문화공원에서 11년째 5월15일에 열리고 있는 설문대할망제는 제주도의 탄생 신화인 ‘설문대할망과 그 아들인 오백장군’을 기리는 문화의식의 하나다. ‘한라산을 베개로 쓸 정도로 거구였던 설문대할망은 오랜 가뭄에 굶주리는 아들 500명을 살리고자 스스로 몸을 솥에 던져 죽으로 먹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아들들은 피맺힌 절규를 토해내며 한라산 영실 분화구에서 오백장군 바위가 됐다.’


온몸 바쳐 죽끓여 아들 500명 살린
제주도 탄생신화 ‘설문대할망’ 기려
해마다 5월15일 여성 9명 제관 맡아
92살 최고령 여성학 대모 특별초청

“사랑과 희생의 모성은 우주의 원리”
제주서 찾은 ‘평화·생태’ 화두 정리중


1973년 제주돌문화공원의 모태인 목석원을 만들고 설문대할망제를 기획해 진행해온 백운철 단장은 “처음 특별제관 제안을 했더니 ‘외지인이라 자격이 없다’며 주저하셨지만 설문대할망 모성 신화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신 뒤 ‘본받아야 할 시대정신’이라며 기꺼이 맡아주셨고 당당하고 기쁘게 해내셨다”고 전했다.


경남 마산 출신으로 이화여대 사회학과 정년퇴임 뒤 1997년부터 ‘제2의 고향’ 진해에서 지역사회운동을 펼쳤던 이 선생은 2013년 제자들의 권유로 제주도에 정착했다. 앞서 지난 8일 제주시내 아라동 자택 근처에서 만난 그는 백발과 주름과 어두워진 귀, 힘 빠진 다리에 간간이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또렷한 눈망울과 특유의 힘찬 목소리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설문대할망 신화에는 우주의 원리가 담겨 있어. 생명을 살리고 창조하는 모성의 이야기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랑으로 희생함으로써 아름다운 섬나라를 창조해냈다는 거잖아. 반면 수천 수만년 남성들이 지배해온 세상에서는 경쟁과 파괴와 죽음이 끊이지 않았어. 이젠 여성들이 나서야 해. 남성들도 설문대할망의 아들들처럼 모성애를 깨달아 상생의 시대를 함께 만들도록 이끌어야 해.”


실제로 설문대할망제의 제관은 2004년 도법·수경 스님을 시작으로 남성들이 주도해오다 2009년부터 여성들이 맡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제주 출신이나 연고가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외지인이자 기독교인으로는 이번 이 선생이 처음이다.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제사’로 알고 우상 앞에 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거부감도 있더군요. 하지만 할망제는 문화의식이어서 형식이나 절차나 자유롭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메밀로 끓인 ‘사랑의 죽’ 한 그릇만 놓고 향과 꽃과 차 9개씩을 9명의 제관이 올린 뒤 오백장군 아들을 상징하는 한라산 철쭉나무 9그루를 기념식수 했습니다.”


백 단장은 “정작 목사(이약신)의 딸로 모태 크리스천인 선생님은 전혀 거부감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이해해주셨다”며 그 덕분에 내년 설문대할망제에서는 역시 크리스천인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부인 강윤형씨가 제관을 맡을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제의 시작을 알린 인류학자 전경수 전 서울대 교수는 ‘왜 제물을 죽으로 선택했는가?’를 통해 “세계의 신화 가운데 죽이 제물로 등장하는 사례는 제주가 거의 유일하다. 스스로를 희생해 자식을 살린 여신의 모습이 얼마나 숭고한가. 제물로 바쳐진 죽에서 어느 신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을 받는다”며 “개인적으로 이제는 ‘제주’가 아닌 설문대할망의 기운이 서려 있는 ‘탐라’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강인숙(전 애월 라이온스클럽 부녀회장), 김영화(경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변영섭(전 문화재청장), 서미경(전 대통령비서실 문화체육비서관), 유연미(<아시아타임즈> 논설위원), 이덕희(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 이선화(제주도의원), 허다솜(요가명상 수행자)씨 등 특별제관을 수행한 8명의 여성 제관도 ‘여성운동은 물론 민주화운동의 선구자이자 큰 스승’과 함께한 뜻깊은 경험이 ‘가슴 벅찬 축복’이라고 입을 모았다.


“제주에 오기를 잘했다고 매 순간 생각해왔지만, 이번에 정말 실감을 했어. 특히 제주의 자연은 내 몸과 정신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아. 나를 불러준 제주도 사람들이 고맙고 제주도도 고마워.”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제주에서 찾아낸 ‘평화·생태’ 화두를 차분히 정리해내고 싶다는 노학자는 머잖아 다시 진해로 돌아가야 할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자들과 지인들은 생활 환경이 자주 바뀌는 것이 연로한 선생의 몸에 자칫 무리를 주지 않을까 안타까워하고 있다.


제주/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제주의 소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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