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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08:54:07 (*.96.1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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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11-20 20:49수정 :2015-11-21 17:41


[토요판] 뉴스분석 왜?
홍성 민간인 학살 유골 수습
발굴단원들이 수습된 유해를 한켠에 모으면서 호미질과 삽질로 시굴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오승훈 기자
발굴단원들이 수습된 유해를 한켠에 모으면서 호미질과 삽질로 시굴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오승훈 기자


▶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대규모 집회에 참가한 농민 백남기(68)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습니다. 그를 죽음 앞으로 몰고 간 공권력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한국전쟁기 국군과 경찰에게 학살당한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기 위해 애끓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들이던 그들을 죽인 국가는 오늘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을 때 국가폭력은 반복됩니다. 멀게만 느껴지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홍성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그날이 음력 6월1일(1950.7.11)이어서 그동안 음력 5월30일에 제사상을 올려왔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유해 사진을 보면서, 저는 아픔마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들은 폐광 동굴(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그렇게 당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국경일에 국기를 내걸지 않습니다. 해마다 가시지 않는 슬픔과 분노로 그렇게 되살아오고 있습니다.”


서울시의회 교육상임위원장을 지낸 최홍이(73)씨는 아버지의 57번째 기일이던 2007년 이런 제문을 남겼다. 한국전쟁기 무고하게 학살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진상 규명과 국가의 사과, 그리고 유해 수습이 이뤄지기 전까진 국기를 내다 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의 아버지 최원복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돼 홍성지역 보도연맹원 30여명과 함께 1950년 7월11일 충남 홍성군 담산리 폐광에서 경찰 등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로 제주 4·3항쟁과 여순 사건을 진압한 이승만 정부는 12월 국가보안법을 시행하고 대국민 사상통제를 위해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조직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전향 단체 대화숙(大和塾)을 본떠서 만든 보도연맹은 좌익 세력에 대한 색출 및 통제, 회유를 목적으로 한 관변단체였다. 사상범이 주된 가입 대상이었지만 공무원의 실적주의에 지역별 할당제가 더해져 전국 30만명의 연맹원 가운데 많은 수가 정치범과는 거리가 먼 이들로 채워지기도 했다. 전쟁 초기 후퇴 과정에서 정부와 경찰은 이 보도연맹원들을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즉결처분’했다.


축사와 사료공장에 둘러싸인 현장


아들 최씨는 아버지와 함께 끌려갔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장동운씨의 증언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아버지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었다고 알게 됐다. “장동운씨가 살아 돌아와 어머니를 만난 건 저도 기억이 나요. 전쟁이 난 해 가을 무렵인데 어떤 아저씨가 집에 와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어머니가 깔고 앉은 밀방석을 쥐어뜯으며 울었는데도 여덟살 철부지였던 전 아무것도 모른 채 잠자리를 잡는다고 고추밭에 갔죠.” 아버지와 함께 구금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장씨는 옆 사람이 총에 맞아 굴러떨어질 때 함께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 뒤 시체 더미에 사흘 동안 숨어 지내 목숨을 건졌다. 군경의 퇴각을 확인하고 사건 한달여 만에 찾아와 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한 것이다.


“그분 말씀이 트럭에 실려 도착한 산골짜기 폐광 입구에서 죽음에 직면한 아버지가 ‘죽어서라도 어린 칠남매를 지켜주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날이 7월11일이에요.” 어린 아들은 그때 여덟살이었다. 


최원복은 충남 홍성공업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해 쫓기듯 고향을 떠났다. 결혼 뒤 함경남도 흥남에서 타향살이를 했다. 해방 이듬해 16년의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접고 고향 홍성에 돌아왔지만 기다린 것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시대의 불운뿐이었다. “막내숙부가 좌익 활동을 했어요. 좌익이 불법화되면서 경찰이 막내숙부를 잡으려다 번번이 실패하자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갔어요”라고 늙은 아들 최씨는 말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칠남매를 건사하는 일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으로 남았다. 어머니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은 가족을 힘들게 한 건 가난보다 동네 이웃들의 잔인한 멸시와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목놓아 울 수조차 없던 강요된 침묵과 굴종의 세월이었다.

그 모진 세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려는 새로운 첫삽이 떠졌다. 지난 15일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공동조사단)이 본격적인 유해 발굴을 앞두고 담산리 폐광에 대한 시굴조사를 벌였다. 한국전쟁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포럼 진실과 정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의 시민사회단체가 2014년 2월 함께 꾸린 공동조사단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작업에 나선 것은 지난해 경남 진주와 올해 초 대전 낭월동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다. 공동조사단은 ‘진주 보도연맹 사건’ 유해 발굴 조사에선 최소 39명의 유해와 탄두와 탄피, 버클 등의 유품을 발굴했고 ‘대전형무소 사건’ 유해 발굴 조사를 통해선 최소 20구의 유해와 탄두, 탄피, 의안 등 다수의 유품을 수습한 바 있다.


골짜기에 도착한 굴착기가 일요일 아침 시골마을의 정적을 깼다. 공동조사단과 유족을 포함한 40여명이 모인 시굴 현장에는 인근 축사에서 끼쳐온 분뇨 냄새가 진동했다. 유족들은 콘크리트 배수로가 가설된데다 지형이 바뀌어 학살이 이뤄진 폐광 입구가 어디인지 선뜻 찾아내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한숨을 지었다. 추정 위치에 굴착기가 자리를 잡자 유족들이 산기슭에 제사상을 차렸다. 제수음식 위로 축사에서 몰려든 파리 떼가 끊임없이 앉았다.


유족 대표로 최홍이씨와 다른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족인 이종민씨가 잔을 올렸다. 이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 말기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해 해방 뒤 홍성군 농민조합장으로 선출된 이강세씨다. 지역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던 그는 대구 10월항쟁에 참여한 뒤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돼 홍성지부 선전부장을 맡았다. 1992년 6월29일치 <주간홍성>은 그가 보도연맹에 가입되면서 시 한수를 지어 벽에 붙여놓고 매일 읊조리곤 했다고 전한다. “설한풍 눈보라에 하도만 시달려서/ 잎다진 무궁화 줄기마저 꺾이었다/ 봄바람 단비 오면 거름부터 주리라.” 시대의 봄을 기다렸던 그는 1950년 6월27일 논에서 일하던 채로 홍성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연행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이강세씨가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희생되었거나 그 와중에 학살된 것으로 추정했다.


보도연맹원과 부역 혐의자들 죽인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폐광
2시간 시굴작업 끝에 입구 찾아
경남 진주와 대전 낭월동 이은
세번째 시민주도 학살 유해 발굴

해방 뒤 홍성은 인민위 활동 활발
중도좌파 입지 넓었던 점이 되레
전쟁기 학살의 명분으로 작용해
최소 1600명 이상 처형 추정
정부는 최소한 윤리적 책임 져야

학살 장소로 추정되는 폐광 입구에서 발굴된 어른 크기의 정강이뼈를 비롯한 여러 구의 유해들. 사진 오승훈 기자
학살 장소로 추정되는 폐광 입구에서 발굴된 어른 크기의 정강이뼈를 비롯한 여러 구의 유해들. 사진 오승훈 기자


정강이뼈와 턱뼈, 그리고 탄두


2시간여 동안 굴착기와 삽질을 동반한 시굴작업 끝에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폐광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30분이 지났을까. 호미질을 하던 한 발굴단원이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어른으로 추정되는 정강이뼈가 드러났다. 인근에서 또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정강이뼈와 턱뼈가 잇달아 발굴됐다. 희생자의 몸에 박혀 있던 것으로 보이는 탄두(카빈 또는 M1 소총)도 나왔다. 어두운 폐광에 암매장된 희생자의 유해가 65년 만에 볕을 본 순간이었다. 이날 유해 수십점이 수습됐다.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는 “매장 사실이 확인된 만큼 올 연말과 내년 초에 본격적인 유해 발굴 조사를 벌일 예정”이라며 “인근 사료공장의 요청도 있어 유해 발굴은 최대 열흘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최씨는 “공직에 있는 동안에 혹시나 받을 불이익이 우려돼 진실화해위에 진실 규명 신청을 내지 못한데다 아버지의 주검까지 찾지 못해 평생 한으로 남아 있었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시굴 조사에서 유해가 발견돼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본격 유해 발굴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당장 본격 유해 발굴에 들어갈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동조사단과 유족들은 지난해 12월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홍성군의회와 올 7월 새누리당 소속 단체장으로는 이례적으로 대표적 학살 장소인 용봉산에 위령비를 세운 김석환 홍성군수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라고 있다.


용봉산과 함께 홍성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장소인 광천읍 담산리 폐광에는 보도연맹 사건 이외에도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과 좌익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9·28 수복 이후 군경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의 시신도 함께 묻혀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는 1950년 10월8일 광천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주민 36명이 광천지서 경찰에 의해 트럭에 실려 와 담산리 마을에서 집단살해되어 담산리에 있는 금광 구덩이에 암매장되었다는 내용의 조사결과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부역 혐의 희생 사건의 한 원인이 된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선 신청사건(8건) 부족 등의 이유로 제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지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발생한 보도연맹원 학살은 가장 비극적이고 규모도 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희생자 수를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수자 전향 기간이 끝났던 1949년 11월30일, 홍성의 자수자 현황이 1380명으로 충남의 타 지역을 압도한 점을 볼 때 홍성지역 보도연맹 사건의 실제 피해 규모는 1000명이 넘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지역보다 홍성의 민간인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은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해방 후 홍성은 충청도에서 인민위원회 세력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중소지주와 자소작농층이 고르게 발달해 계급간 적대감보다는 일제의 수탈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자리잡은 지역이기도 했다. 해방 뒤 민족운동 과정에서 중소지주층에 기반한 중도우파 계열이 상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사회주의 계열 역시 좌우간 대립보다는 합작의 틀을 전제로 활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이었다.(장규식, ‘해방후 홍성지방 중도우파사회주의 진영의 국가건설운동’)


그러나 냉전의 심화와 미군정의 친일세력 중용에 따른 친일 극우세력의 부상은 극단적인 이념대립을 불러왔고 홍성지역의 좌우 공존 ‘전통’도 이러한 국내 정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량학살을 벌였고 이는 단군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으로 남았다. 보도연맹 사건 이후 북한은 남한 점령지역에서 살아남은 연맹원들로 하여금 의용군을 조직하게 했고 이는 곧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 치안대, 보도연맹원 유가족, 인민군 등 좌익들이 점령지 곳곳에서 공무원과 경찰이 포함된 우익 인사들을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지난 15일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에서 한국전쟁기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해 발굴을 위한 시굴조사가 진행됐다. 시굴에 앞서 유족 최홍이씨와 이종민씨가 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 오승훈 기자
지난 15일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에서 한국전쟁기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해 발굴을 위한 시굴조사가 진행됐다. 시굴에 앞서 유족 최홍이씨와 이종민씨가 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 오승훈 기자


과거사법 개정안 국회에서 2년째 낮잠


홍성 또한 좌우익 간의 ‘피의 보복’을 피할 수 없었다. 2009~2010년 진실화해위가 발표한 조사결과 보고서(충남 서부지역 보도연맹사건, 충남지역 부역혐의희생사건, 홍성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들을 종합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부터 10월까지 충남 홍성지역에서 한국 군경, 인민군 등에 의해 각각 최소 100여명의 보도연맹원과 630명의 부역 혐의자, 55명의 우익 인사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지역보다 활발했던 중도좌파 운동의 흐름이 보도연맹원들의 대량 가입을 낳았고 이것이 결국 대규모 학살의 원인이 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한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에 의한 학살보다 한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 규모가 압도적으로 더 크다는 점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보복전쟁’임과 동시에 옛 친일 엘리트들의 위기의식과 열등감이 불러온 중도파나 중도좌익 인사들에 대한 ‘절멸전쟁’이기도 했음을 의미한다.


공동조사단의 안경호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당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한 뒤, 지하 광산이나 이름 모를 산속에 수십년 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어 왔다. 그나마 진실화해위가 일부 유해와 유품을 수습해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치하였으나 진실화해위의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국가 차원의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안 사무국장은 “특히 미신고 유족에 대한 추가 조사와 과거사 연구 재단 설립 등을 뼈대로 하는 과거사법 개정안은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과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2년째 계류중이다.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돼 유족들의 한을 국가가 어루만져야 한다”고 했다.

홍성/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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