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19 18:40


그런데도


이웃 산골 마을에 아들이 공무원인
할아버지가 사는데 말이에요
농사지으면서도 틈만 나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공무원처럼 양복을 자주 입고 다녀요
공무원처럼 운동복을 갈아입고 산책을 해요
공무원처럼 걸음도 천천히 걸어요
공무원처럼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아요


이렇게 자식들 때문에 부모가 바뀌기도 하지만,
부모 때문에 자식들 팔자가 바뀌기도 해요
아버지가 대학교수였던 영민이는
대학교수가 되었고요
아버지가 문방구를 하던 태식이는
초등학교 앞에서 이십 년째 문방구를 해요
아버지가 비정규직이던 순철이는
아직도 자동차 공장 비정규직이에요
살기 좋은 우리나라는
아버지가 판검사고 대통령이면
그 자식들도 판검사가 되고 대통령도 되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가난을 업으로 안고 살았어요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위해
자식을 낳아 전국 팔도에 빠짐없이 내보냈지요
공장으로 식당으로 고물상으로 건설 현장으로……
그런데 말입니다
일밖에 모르고 거짓말할 줄도 모르고
부지런하게 살아온 그 자식들도 아버지를 닮아
아직도 가난이 업인 줄 알아요


‘이명박씨가 대통령 해 먹을 때
4대강, 자원 외교, 방위 산업 따위로 날린 돈이
100조원이나 된다는데요그 돈이면 집 없는 사람들한테
2억짜리 집 50만채를 공짜로 지어줄 수 있대요’
100조원, 그 돈은 모두
일밖에 모르고 거짓말할 줄도 모르고
부지런하게 살아온 어진 백성들이 흘린 땀이라요
그런데, 그런데도요
그 주인인 백성들은 아직도 가난이 업인 줄 알아요
어처구니없는 대한민국 이 땅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데도


서정홍/농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