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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3-31 18:57 

유엔은 1948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을 공포했다. 선언문 전문에는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법에 의한 통치에 의하여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제주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루 평균 96명이 희생됐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4·3의 비극성은 숱한 인권유린과 불법으로 상징된다.

그해 말, 제주도의 중산간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불바다가 됐다. 당시만 해도 중산간마을이나 다름없던 제주시 연미마을에 살던 양치부(76)씨는 4·3 당시 부모를 모두 잃었다. 부친은 토벌대에 연행된 뒤 육지 형무소로 이송됐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행방불명됐다. 청각장애인이었던 모친은 당시 피난을 가다가 토벌대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총살됐다. 부인 김순혜(78)씨는 12살이던 1948년 11월 당시 군인들이 쏜 총탄의 파편을 맞았다. 김씨는 파편 제거수술을 받아 완치됐다고 생각했으나 계속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다. 병을 낫게 한다는 굿도 여러번 했다. 평생 통증을 달고 살았다. 1994년에야 병원에서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폐에 박힌 파편 조각을 발견해 제거수술을 받았다. 그 뒤에도 여전히 장애를 앓고 있는 4·3후유장애인이다. 제주도의 촌로를 붙잡고 물어보면 이런 사연들이 숱하게 쏟아지는 것이 4·3이다.

억울한 죽음과 상흔을 가슴에 담고 숨죽이며 살아온 이들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빨갱이라는 누명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는가.

그러나 이들은 어느 누구 탓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4·3의 기억을 지우려고 침묵 속에 살다 최근에야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이 왔나 보다’ 하고 있다. 모든 게 ‘시국’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국가의 잘잘못을 가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또다시 침묵을 강요하는 세력들이 있다. 4·3특별법이 제정되자 4·3 당시 악명높았던 서북청년회 중앙위원장 출신 등 보수 인사들이 “4·3특별법이 헌법이 정한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것을 시작으로 진상규명과 희생자 결정을 뒤집으려는 보수진영의 ‘4·3 흔들기’는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희생자 결정과 진상조사보고서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6건에 이르는 각종 소송을 제기했으나 모두 패소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희생자 재심의를 통해 이른바 ‘불량 위패’를 위패봉안소에서 철거하라고 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제주4·3평화공원 내 전시물이 잘못됐다며 소송을 내는 이들도 있다. “너희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며 끝까지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유족들은 2008년 60주년을 기점으로 이런 논란을 불식하고 희생자와 도민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대통령의 참석을 호소해왔다. 지금까지 8년째 대통령의 참석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올해는 도지사와 여야 도당, 유족회·경우회 등이 나서서 10차례나 박근혜 대통령의 4·3추념식 참석을 요청했으나 ‘희생자 재심의 논란’을 이유로 대통령은 불참할 것으로 알려졌다.

허호준 사회2부 기자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제주도민들이 대통령의 참석을 호소하고, 유족들을 위무해 달라고 ‘읍소’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이틀 뒤면 제주도민의 10%가 희생된 제주4·3이 일어난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의 모든 관련자들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게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길이라 생각해본다. 침묵의 강요를 넘어 관용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후세대에게 남겨줄 역사적 교훈이다.

허호준 사회2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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