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2.26 22:18


국가기록원 ‘3·1운동 자료집’ 펴내
남부지역 시위 양상·판결문 실어

“대정 8년(1919) 4월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갔을 때 윤수선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 강덕수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 박소수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략)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 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丁)의 도로를 열을 지어 걸었다.”

일제 강점기 3·1운동에 나선 밀양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14~15살 소년들에 대한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사진)의 한 대목이다. 법원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어린 소년들에게도 보안법과 형법 등을 적용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국가기록원은 영남과 호남, 제주의 3·1운동을 담은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펴냈다고 26일 밝혔다.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전개 양상뿐 아니라, 평범한 이들에 대한 판결문 원문 50건(286명)을 한글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1919년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기생 정막래(당시 21)와 이소선(당시 20)의 판결문은 국권을 되찾으려는 민족적 열망에 귀천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들은 통영 기생조합 소속으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 모아 기생단을 조직하고, 금반지와 금비녀 등을 맡겨 같은 복장 차림을 한 뒤 시위에 나섰다. 판결문은 “기생 7명은 열광적인 기세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불렀다”고 적고 있다. 법원은 이들에게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만세 운동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 장터에서 시작됐다. 경북 청도의 단산서당에 다니던 이승덕(18), 최갑수(20) 등은 경부선 열차에서 승객들을 대상으로 철길 옆 나무에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독립운동 판결문 원문과 번역본은 국기기록원 누리집(archives.go.kr)을 열어 기록정보콘텐츠-전문콘텐츠를 누르면 열람할 수 있다.

정태우 기자 windage3@hani.co.kr



14살 학생부터 기생, 승려까지…일제 판결문에 드러난 3·1 만세운동

등록 : 2015.02.26 14:37

“대정 8년(1919) 4월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갔을 때 윤수선(尹秀善)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 강덕수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 박소수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략)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武安) 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丁)의 도로를 열어 지어 걸었다.”

알제 강점기 3·1운동에 나선 밀양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14~15살 소년들에 대한 판결문의 한 대목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부터 기생, 승려까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일제 강점기 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확인됐다. 일제에 의해 식민화된 당시 법원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소년들에게도 보안법과 형법 등을 적용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국가기록원은 일제의 판결문을 통해 본 영남과 호남, 제주의 3·1운동을 담은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펴냈다고 26일 밝혔다. 남부지역 3·1운동의 전개양상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판결문 원문 50건(286명)을 한글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지난해 경기·강원·충청 등 중부지역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을 펴낸 데 이어 두번째다.

이번에 펴낸 자료집에 실린 판결문을 살펴보면, 기생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통영의 기생조합 소속 기생 정막래(21)와 이소선(20)은 금반지와 금비녀 등을 팔아 같은 복장차림으로, 수천명이 함께 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탰다. 식민지 법원은 정막래와 이소선에게 각각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밀양 표충사 승려였던 이장옥(27)은 동료들과 함께 약 1500명의 군중을 독려하여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였다. 하동 적량면장 박치화(40)는 면장직을 사직하고, 하동 읍내장날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기록원은 남부지역에서 전개된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했다고 분석했다. 만세운동을 이끈 이들은 미리 ‘독립선언서’ ‘격문’ ‘경고문’ ‘권유문’ 등을 만들거나 공공장소에 붙였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만세운동을 벌일 장소 근처에 숨겨두었다. 독립운동의 발화점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이었다. 시장에서 시작된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경찰서, 주재소, 군청, 우체국, 면사무소, 학교 앞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산과 들, 포구, 역 광장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북 청도의 단산서당 학생이었던 이승덕(18), 최갑수(20) 등은 경부선 열차에 승차한 군중들을 대상으로 철길 옆 나무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기록원은 교사와 학생은 물론이고 승려, 목사, 관료, 농민, 노동자, 상인, 수공업자, 기생 등 나이와 신분을 뛰어 넘어 각계각층의 조선인이 3·1운동의 주인공이었음이 판결문 분석을 통해서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 판결문 원문과 번역본은 국기기록원 누리집(http://archives.go.kr)을 열어 기록정보콘텐츠-전문콘텐츠를 누르면 열람할 수 있다. 인명, 지역명과 혐의별로도 검색할 수 있다. 정태우 기자 windage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