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19 20:47

등단 40주년을 맞아 ‘중단편 전집’(전 3권)을 펴낸 작가 현기영. “젊은 작가들이 작은 것에 대한 미학적 접근도 소중하지만, 큰 이야기와 강한 울림을 주는 소설을 더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현기영 등단 40년 중단편전집 출간
‘순이삼촌’ 등 제주 4·3 고발과 위로
늙은 작가의 새 장편 기대해달라…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현기영 지음/창비·각 권 1만3000원


“작가로서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어느새 등단 40년이네요. 허허. 세월이 냉정하고 냉엄하네요. 가차없는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일깨워 줘서야 올해가 40주년인 걸 알았어요.”


소설가 현기영(74)은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았다. 출판사 창비는 그의 소설집 세권을 ‘현기영 중단편 전집’으로 새로 펴내 현기영 문학의 불혹을 기념했다.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에는 그간 그가 발표한 단편 28편과 마당극 ‘일식풀이’, 희곡 ‘변방에 우짖는 새’ 등 모두 30편이 갈무리되었다.


책을 내고 1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오래전에 쓴 글을 다시 읽자니 내가 아닌 어떤 젊은 작가의 글을 보는 듯 낯설고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느낌도 들더라”며 “어느덧 연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전집 출간을 계기로 창작의 추진력을 다시 얻은 듯한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현기영 문학의 바탕에는 그의 고향 제주 그리고 제주 현대사를 강타한 1948년 4·3사건이 있다. 등단작인 단편 <아버지>부터가 그러하다. 조이스와 포크너의 모더니즘에 경도되었던 그의 첫 소설은 아비 잃은 소년의 성장을 섬세한 심리 묘사와 인상적인 풍경 및 삽화로 그렸는데, 어린 주인공의 삶을 규정한 아비의 실종은 역시 4·3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문장과 스타일은 모더니즘의 영향을 짙게 내비친다.

“뜨겁고 바람기 한점 없는 정오. 고막에 달라붙은 매미 울음소리. 그림자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사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시간. 그런데 운동장의 넓은 백색은 조용히 유동하며 복판의 흑점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에 타 죽은 산폭도라고 했다.”


1978년에 발표된,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자 작가로 하여금 1979년과 1980년 두차례에 걸쳐 군 합동수사본부와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 책 판매 금지 처분까지 받게 한 중편 <순이삼촌>은 ‘현기영 4·3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86년에 낸 두번째 소설집 <아스팔트>에서는 역사적 사실 규명과 고발보다는 상처의 위무와 화해를 향해 한발 나아간 작품들이 보인다. 표제작과 또 다른 단편 <길>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 모두 4·3 당시 주인공 아버지의 죽음이나 가족의 고초를 초래한 가해자의 임종에 즈음해 낡은 원한을 떨치고 화해와 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이 두드러진다.


1994년에 낸 세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집 <마지막 테우리>에는 어느덧 반세기 전 과거로 물러나 버린 4·3을 대하는 작가의 양면적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 둘이 있다. 표제작이 4·3을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태도를 대표한다면 <쇠와 살>은 30여개 짧은 장면과 10여개 논평적 서술이 교차하면서 매우 실험적이면서도 강렬하게 4·3의 비극과 죄악을 고발한다.


사실 4·3은 현기영 소설 전체에서 3분의 1 정도 비중을 지닐 뿐, 그의 소설 세계는 소시민의 허위의식과 지식인의 고뇌, 교육 현장의 부조리 등을 두루 망라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제주 및 4·3 작가’로만 규정되는 데 대해 작가로서는 아쉬움과 불만이 있을 법도 하다.


“지금은 그런 규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처음엔 무척 싫었어요. 문단에서조차 무슨 ‘제주 풍토병’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사실 4·3 당시 제주는 한반도의 모순이 집약된 곳이었기 때문에, 4·3은 우리 국민 전체의 아픔을 대신 앓은 사건이었어요. 제주 말로 무당을 심방이라고 합니다. 심방이 원혼을 달래 주는 것처럼 저 역시 4·3의 원혼을 글로써 위로하는 심방이라 생각해요. 심방에게 후회나 불만은 있을 수 없죠.”


등단 40년을 맞은 현기영은 <누란>(2009) 이후 6년여 만에 새 장편을 준비 중이다. 이 역시 4·3을 다룬 작품이지만, 정치적 상황을 중요하게 부각하는 대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될 것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늙은 작가도 잘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