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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네이버 사전

->난징사건이라고도 한다.

일본군이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했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시내의 약 1/3이 소실됨)도 횡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에도, 또한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극동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마쓰이가 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또 당시의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長谷壽夫]를 포함한 여러 명이 난징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서 사형되었다.

=난징 (南京)=

난징 (南京)은 중국 4대 고도 (古都)중 하나이며 산둥성 (山東省)과 상하이 (上海) 사이에 위치한
장쑤성 (江蘇省)의 성도이며 옛 오 (吳)나라와 송 (宋)나라의 도읍지였고, 명 (明)나라가 베이징 (北京)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도읍지였고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의 현장이다.

=나지조차 야만적이라 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지구상 인류의 존재 이후 최악의 대참사, 인간의 잔혹성을 가장 잘 드러낸 홀로코스트인 난징 대학살은 1937년 12월부터 약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자행 되었다.

이들의 살해방식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참혹했다.

공식기록으로 난징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30만명의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인 일본군에 의해 게임하듯 잔인하게 도륙 되었고, 2만이 넘는 나이어린 소녀와 부녀자들이 강간당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강간한 후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노는 만행이 이루어 졌다.

또한 그종군위안부를 만들어 여자들을 모아다가 자신의 성적 노리개로 삼은 후 기념촬영을 한 후 역시 살해했다.

그 당시 난징에서 보이는 여성의 시체는 하나같이 하의가 벗겨진 알몸이었다.

어린 아이집어던져 총칼에 꽂아 죽이기까지 했으니 그들은 정말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일본군은 마치 곤충이나 가축을 죽이듯 아무 죄책감 없이 기총을 이용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고 가족 앞에서의 강간, 집단 강간가족끼리 서로 강간하도록 협박하고 100명의 중국인 목베기 시합 등등...난징대학살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근대 역사상 저질러진 가장 포악하고 야만적인 학살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난징에는 많은 서양인들도 있었고,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기록을 남기로 일본군에 더이상 학살을 자행하지 말것을 어르기도 했다.

▲강간후 옷을 벗겨 희롱하는 일본군

▲시체 옆에서 웃고있는 일본군

▲길거리에 널부러진 수많은 시체들

▲어린아이들까지 죽이는 일본군

▲5살 아래의 아이들 시체

▲일본군 소위 두명이 100인 목베기 시합을 했다는 당시 일본신문 기사

▲위의 두 사진은 총으로 양민을 죽이는데

실증난 일본군은 산사람에게 디젤 오일을 부어 태워 죽인 것

▲1937년 8월 상하이 침공시 양민을 학살하는 모습.
당시 무수히 많은 양민들이 일본군의 잔인한 총칼에 도륙 되었다.
불허가(不許可)라고 씌여진 일급 비밀사진으로 당시 출판금지된 사진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총검술을 연습하는 일본군

▲오늘 중국인들은 그 때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분노의 조각상을 세웠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야외에 세워진, 학살 당시의 참상을 표현한 부조[浮彫]

▲일본군은 임산부를 강간하고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기도 하였다.

▲칼날을 시험하듯 공개적으로 목을 치고 있는 일본군

더 나아가 일본의 언론은 군의 사기를 높힌다는 명목하에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학살을 경쟁적으로 부추겼다. 신문은 이러한 살인 경쟁을 인터뷰하고 그 승자를 보도했다. 그러한 인터뷰는 살인자를 자랑스러운 행위를 한 인물로 조작했고,

그들의 용기는 기록되고 널리 알려졌다. 그들의 이름은 하급 장교 였던 무카이도시아키, 노다 다케시였다

▲무카이도시아키, 노다 다케시

남경 도착전에 누가 100명을 먼저 죽이는가가 그들의 목표였다. 무카이도 시아키는 89명을, 노다다케시는 78명을 죽여 목표엔 실패 했지만 그들의 경쟁적인 살인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무카이도시아키250명을 죽여 노다다케시를 크게 앞질렀다. 그래서 노다다케시1000명을 목표로 하는 경쟁을 무카이에게 제안했다." 자료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38년 2월 9일자)

=중국의 쉰들러 욘라베=

그 중 중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욘 라베 (John Rabe)도 난징에 있었다.

그는 나치당원이였으나 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대사관에 학살을 멈추라고 요구하기도 했고, 그는 히틀러에게 여러번 일본이 중국한테 하는 만행을 막아달라고 수차례 엽서를 띄웠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무응답이였다고 한다.

안전지대를 관리하던 욘 라베는 수십만의 중국인들을 구하며 중국의 쉰들러라 불리게 되었으나 독일에 돌아간 후 게쉬타포에게 체포되어 침묵할것을 강요 받았으며, 첩거한채 여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런 욘 라베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공산화가 되면서 욘 라베에 대한 은혜를 잊었다고 한다.

▲욘 라베

난징대학살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의 공격속에서 죽고 부상을 입고 있었고 많은 중국인들은 욘 라베의 자택에서 운영하는 임시병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의 자택엔 일본군들이 몰려왔고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였다.

그때 그는 한 천을 들었다.

"나는 나치 당원이요! 나를 쏠수 있겠소?"

당시 독일과 동맹하여 같은 추축국관계였던 일본 상태로 볼때 독일인 자체로만으로도 함부로 죽일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치당원이라는 엄청난 신분은 절대로 함부로 할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어쩔수 없이 욘 라벨의 자택은 물론 그가 정해놓은 난징 보호 구역엔 접근할수가 없었고

그의 집에 피난해 살아난 중국인은 약650명이고 보호구역 총 생존 인원은 20만이라고 한다

서방세계에선 나치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동방세계에선 나치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욘 라베를 주제로한 영화 포스터

개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이 사실이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난징대학살을 주제로 책을 쓴 작가, 아이리스 장=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원제, The Rape of Nanking)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증언자들의 인터뷰, 자료사진 등을 통해 1937년 난징대학살에서 일어난 대학살과 일본인들의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려 쓴 책이다.

책의 저자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중국인 부모 아래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어릴 적 조부모로부터 난징학살에 대한 참상을 들으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관심을 시작으로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1997년 미국에서 <The Rape of Nanking>을 출간해 첫 해에 세계적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고 6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이 후 난징 희생자들을 위해 싸우며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된다.

그러나 책 출간 후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협박편지와 전화를 받으며 줄 곧 공포와 협박 속에서 생활한다.

아이리스 장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정신과 진료를 받다가 이기지 못하고 결국 2004년 36세의 나이로 머리에 총을 겨눠 자살한다.

▲난징대학살을 주제로 책(난징의 강간)을 쓴 작가 아이리스장

이 책에 기록된 난징의 참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문화와 예술 정치의 중심지, 최초의 문호개방이 이루어졌던 도시, 1911년 쑨원이 중화민국 사상 첫 임시대통령을 선포했던 역사의 도시 난징은 없다.

난징의 화려함은 피로 물든 장강의 피빛과 타오르는 시체들의 검은 연기로 얼룩졌다.

잔혹한 일본군은 사람들을 한 가운데 몰아 놓고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했으며, 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어버리는가를 내기했으며,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으며, 임산부의 경우 배를 갈라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까지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장체스 총통이 난징에서 철수 명령을 내리고, 미국 등 외신들은 그 참상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이 난징에서는 매일 거듭해서 끔찍한 행위들이 벌어졌다.

=도대체 총과 칼을 겨눈 일본인들의 정신상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국화와 칼>의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의 의견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의 주장은 일본인이 보여준 이 잔인성은 문화적 특징에 기인하는 것인데, 이들에게 도덕적 임무란 지역적이고 제한적이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파괴된다는 것이다.

천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목숨, 자신의 목숨조차 가치 없는 것이라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도덕적 테두리를 벗어나는 범위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들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이들도 필립 짐바르도가 <루시퍼 이펙트>에서 주장했듯이 결국 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상황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은 지금 어떠한가?=
97년 미국에서 출간된 <난징의 강간>은 일본 내 난징대학살 부정파의 관심의 초점이 된다. 출간되자마자 50만부를 훌쩍 넘긴 <난징의 강간>이 서구 사회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판단한 부정파는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僞書)로 규정한다.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을 펴내고자 했던 한 출판사는 결국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않은 <난징의 강간>의 비판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부정파들의 주장대로 <난징의 강간>에는 아이리스 장이 잘못 인용한 사진들이 있다. 난징이 아닌 사진도 있고, 영화 장면에서 온 것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난징대학살 부정파는 <난징의 강간>에서 잘못 인용된 사진난징대학살 전체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부인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