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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5-18 10:20수정 :2015-05-18 15:54

 

김의겸의 우충좌돌 (20)
결정적 물증 ‘김기설 수첩’ 마저 조작으로 몰고 증인 찾아나선 기자를 연행
치욕과 고통의 24년이 가져다 준 간암…검찰도 법원도 위로 한마디 안건네
대법 무죄 판결 있던 날 종적 감춘 강기훈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91년 ‘유서 대필’ 누명을 쓴 강기훈이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유서의 필적과 자신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똑같은 내용을 써 보이고 있다. 그 왼편은 취재를 하고 있는 필자다.
1991년 ‘유서 대필’ 누명을 쓴 강기훈이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유서의 필적과 자신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똑같은 내용을 써 보이고 있다. 그 왼편은 취재를 하고 있는 필자다.


“카톡” 알림음이 울려 카톡을 열어보니 친구 녀석이 사진 한 장을 보내줬다.(사진 위) “24년 전, 끄~응”이라는 신음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페이스북에 걸려있는 사진을 퍼온 것이란다. 가운데가 강기훈이고 맨 왼쪽 뿔테 안경 쓴 이가 나다. 강기훈이 ‘유서 대필’ 누명을 쓰게 되자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면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아마도 유서의 필적과 자신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기자들 앞에서 유서와 똑같은 내용을 써 보이고 있는 모습같다. 햇병아리 기자인 주제에 내가 그 옆에서 뭔가 열심히 취재를 하고 있다.


사진 속 내 모습이 영 낯설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머리숱이 듬성듬성하고 배는 볼록 튀어나왔는데, 스물여덟살의 나는 ‘그런대로 봐줄만하군’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기훈을 자세히 보는 순간 내 ‘노화’를 따지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 부끄러움이 확 다가왔다. 사진 속 그의 모습은 젊다 못해 앳돼 보이기까지 한다. 그때 그를 보면서 참 단정하고 깨끗하게 생겼다고 느꼈더랬다. 그런데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보낸 치욕과 고통의 24년은 그의 곱던 모습을 망가뜨렸다.(사진 아래)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치욕과 고통의 24년을 보낸 지금의 강기훈. 한겨레 자료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치욕과 고통의 24년을 보낸 지금의 강기훈. 한겨레 자료


언젠가 칼럼에 한번 썼듯이, 3년 전 쯤 강기훈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한참 두리번거리고서도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강기훈이 먼저 아는 체를 하고서야 그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하얀 얼굴에 훤칠한 키였는데, 거무튀튀한 낯빛으로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눈은 퀭하니 꺼졌고, 눈 밑 그림자는 짙었다.


강기훈은 병을 앓고 있다. 간암이다. 풀리지 않는 억울함, 잇따라 부모님을 저세상으로 보낸 자책감, 경제적 궁핍이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정기검진만 제대로 받았어도 일찍 이상신호를 알아차렸을 텐데, 공사판 막노동을 전전하기도 했던 그의 불안정한 생활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21년 전 그 사건 이후로 난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어. 특히 그 사건이 터진 5월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아파”라며 씁쓸해했다. 강기훈의 병을 아는 한 의사는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약화시켰고, 그게 병을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내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


주말에 강기훈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통 안 받더니 세번인가 네번 전화를 하니 그때서야 겨우 받는다. “내가 기자들 전화는 안 받는데….” 그런데 막상 전화가 연결되니 별로 궁금한 게 없다. 겨우 물어 본 말이 “목요일 대법원 판결 날 때 왜 안 나왔어?”다. “그냥 들러리 서기 싫어서….” 돌아오는 답도 짧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건강은 좀 어때?” 그런 걸 몇 마디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다. 그가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사실 옮길 말도 별로 없다.


24년 만에 정의가 실현됐다고?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도대체 그래서 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싶다. 1년여 전인 2014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을 때만 해도 강기훈은 기자회견에 나섰다. 그리고 당당히 요구했다. “당시 검사들은 나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유감을 표시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검찰이 또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는 것이었다. “검찰이 강기훈이 죽기만 바라는 것 아니냐”는 분통이 터져나왔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고서도 검사들의 기세는 등등하다. 당시 강기훈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남기춘 변호사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사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척도로 옛날에 한 판결을 다시 하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며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한 판결도 지금의 잣대로 하면 결론이 달라지는 게 많을 것”이라고 했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서울고등법원에서 2009년 재심 개시결정을 처음 내린 뒤, 대법원이 최종 재심 개시를 결정한 건 무려 3년도 더 지난 2012년 10월이었다. 2014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대법원은 또다시 1년3개월이 지나서야 최종 선고를 내렸다. 뭘 쓰느라 그렇게 오래 걸렸나, 아무리 판결문을 뒤져봐도 고등법원 판결문을 요약한 수준이다. 강기훈에게 사과나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강기훈이 결백하다는 수많은 증거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한다는 듯한 태도다.

몇몇 언론은 더하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법관의 주관적 판단이 달라지면서 원래와 정반대되는 판결이 나왔다.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재판부마다 다를 수는 있다.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실은 강기훈만이 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토록 ‘법치’를 외치는 조선일보가 대법원 판결마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얘기인가. 인생이 망가진 한 인간에 대해, 아니 한 인생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한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분위기이기에 강기훈은 아마도 분노할 기력마저 잃었나 보다. 대법원 판결이 나던 날 그는 아예 모습을 감춰버렸다. 지속되는 치욕을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 게다. “그냥 들러리 서기 싫어서…”란 말을 난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는 4일이 지난 18일에서야 짤막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가름했다.


강기훈과의 인연은 꼭 24년 전 오늘인 5월18일 시작됐다. 그날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강경대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 행렬을 따라 취재를 하고 있는데, 삐삐가 요란하게 울렸다. 무조건 강기훈을 찾아내서 신문사로 데리고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마침 군중 사이에 있는 강기훈이 눈에 띄어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회사차에 태웠다. 회사 선배는 다짜고짜 투신 자살한 김기설의 유서를 내보이며 써보라고 했고, 강기훈은 얼결에 써보였다. 그때만 해도 우린 사태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에이~. 영 다른데”라며 유서 대필을 보도한 어느 석간신문 기자가 “지나치게 상상력을 동원해 기사를 쓴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나는 그 뒤 강기훈 담당이 됐다. 김기설의 필체를 찾아다니고 이를 사설 감정인들에게 의뢰해 강기훈의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김기설의 새로운 필체가 나타날 때마다 “이제는 검찰이 수사를 끝내겠지”하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매번 좌절이었다. 검찰은 어떤 증거가 발견돼도 다 조작이라고 했다. 특히 김기설이 쓰던 전민련 수첩이 발견되었을 때가 그랬다. 수첩은 누가 봐도 유서와 같은 필적이었다. 그 수첩을 검찰에 가져다 줄 때 나는 이석태 변호사(현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와 한 차를 타고 검찰청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이석태 변호사가 “이제는 상황이 다 끝났다”며 안도하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수첩을 건네 받은 신상규 검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것도 잊지 못한다. 그런데 며칠 뒤 검찰이 “수첩의 절취선이 맞지 않는다”며 그 수첩마저 강기훈이 급하게 조작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나섰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번은 김기설의 여자 친구 홍아무개씨를 찾아 성남 시내를 샅샅이 뒤진 적도 있다. 홍씨는 당시 사건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증인이었는데, 검찰이 홍씨를 빼돌려 성남에 사는 성이 표씨인 사람 집에 숨겨놓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김이박도 아니고 표씨라면 희성이니 한번 찾아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성남의 동사무소란 동사무소는 다 뒤져가며 표씨 집을 하나하나 확인해 들어갔다. 발바닥이 아파질 시간 쯤이었는데, 어느 표씨 집 문패를 확인하고 집에 들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건장한 체격의 형사가 나타나 나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주변에 강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용의자와 비슷하니 경찰서까지 같이 가야겠다”며 강제로 연행해가는 거다. 도중에 경찰서를 뛰쳐나와 표씨 집으로 줄달음치기도 했는데 경찰보다 뜀박질이 느려 다시 잡혀서 끌려가기도 했다. 그날 저녁 검찰은 자신들이 홍씨의 신변을 보호중이었다고 인정했으나, 홍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상고 기각, 저 한마디 듣자고 24년을…”


옛날 일들은 다 씁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취재기자도 그런데 강기훈 본인과 그가 속했던 전민련 사람들은 오죽했겠는가. 지난 14일 대법원 최종 선고가 내려지던 날 법정을 찾아 가봤다. 이창복, 이부영 등 당시 전민련을 이끌었던 원로를 비롯해 당시 전민련 실무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판결인가. 하지만 너무나 간단했다. 대법관이 “사건번호 2014도2946 피고인 강기훈, 검사 상고를 기각한다”고 낭독한 게 전부였다. 다들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와 손을 맞잡으면서도 “저 한마디 듣자고 24년을 기다렸단 말인가”라며 허탈해했다.

그 뒤 이른 점심자리가 이어졌는데, 막걸리 잔이 빠르게 돌아갔다. 다들 강기훈과 얽힌 이야기를 안주 삼아 권커니 잣거니 했다. 김기설이 유서에 “향후 모든 것은 김선택씨와 서준식씨에게 일임한다”고 써놓는 바람에 ‘죽음의 배후’로 몰린 전민련 간부 김선택씨는 당시 2년반 동안 수배를 받고 여관방을 전전하며 고생한 얘기를 했다. 나중에는 너무나 지쳐서 어서 경찰이 날 잡아갔으면 싶더란다. 그리고 지금도 여관 냄새라면 질색이어서 아무리 술을 마시고 늦더라도 꼭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간다고, 요즘은 사는 곳이 충청도여서 엊그제는 택시비만 10만원이 넘게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술잔이 오가는데 기어코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강기훈의 여동생이었다. “오빠가 건강해지기만 한다면…내 가진 모든 걸 내놓겠어요. 오빠~” 모두들 숙연해졌다. 강기훈의 여동생은 변호사이고 지금은 전북도교육청의 인권옹호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 취재기자 자격으로 막걸리 몇 잔을 받아 마시다 취기가 올라왔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먼저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다리에 맥이 풀리면서 자꾸만 휘청거렸다. 속은 헛헛하고 욕지기마저 느껴졌다. 꼭 막걸리 탓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5월의 햇살은 환장하도록 화사했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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