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30 21:03수정 : 2014.12.31 13:13


[한겨레 선정 올해의 인물]

‘불통의 땅’에 큰 울림 준 소통



대통령이 외면한 세월호 유족 만나는 등
‘고통받는 이와 연대’ 강조한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있어서 목놓아 울 수 있었다. 기댈 곳 없이 지쳐 쓰러지던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엄마의 포대기였고, 젖가슴이었다. 진상규명을 철썩같이 약속해놓고 헌신짝 뒤집듯 외면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표변에 절망하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프란치스코란 징검다리마저 없었다면, 2014년은 건너기엔 너무도 시퍼런 강이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진상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한달이 넘게 단식하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대통령이 만나주지조차 않는 불통의 나라에 왔다. 8월14일~18일 4박5일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 땅에 큰 울림을 남겼다. 124위 시복식 장소인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하던 세월호 유족들은 하늘에서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내려오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의 도움을 고대했다. 그는 어렵고 힘든 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교황은 노란 추모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녔으며, 광화문에선 유민 아빠를 찾아내 손을 잡아주었다. 실종자 가족에게 위로의 편지를 남기고, 유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에서부터 도보순례하며 지고온 십자가를 로마로 가져갔다. 로마로 가는 기내에서는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서 단 지 반나절쯤 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면서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세모녀가 자살하고, 차별과 냉대에 아파트 경비원이 분신하고, 복직을 요구하는 해고 노동자들이 살인적 추위 속에서도 굴뚝에 오르는데도 높은 사람들의 응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라에 그는 낮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지도자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에게는 “교회란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그가 준 것은 위로만이 아니었다. 고통 받는 자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채근이야말로 프란치스코다운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비정규직, 버텨라 이겨라


결국 정규직 꿈 이루지 못한
드라마 ‘미생’ 주인공 장그래

<미생> 장그래


“평소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이대로만 하면 정직원이 되는 거죠?” 드라마 <미생> 속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장그래는 “안 된다”는 오상식 차장의 차가운 말에도 ‘평소대로’ 일했다. 장그래와 같은 시기 정규직으로 입사한 동기 한석률이 “동기 최초로 임원들이 참석한 프리젠테이션(피티)을 진행하고 그 피티를 통해 묻힐 뻔한 요르단 중고차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안타까움은 장그래만의 것이 아니다. 올해 6월 현재 2년 미만 기간제 노동자 77%가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야 했으니까. 장그래는 열심히 일해도 정규직과 달리 임금도 올려받지 못한 채 고용불안과 차별에 시달리는 852만(전체 노동자의 45.4%) 비정규직 노동자 중 한 명일 뿐이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2014년 대한민국은 장그래를 현실로 자꾸 불러낸다. “당사자가 원한다”며 고용노동부는 35살 이상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찬성론자는 “장그래를 위한 대책”이라며 맞장구친다. 하지만 노동계는 “장그래 양산법”이라며 반발한다. 한국노총이 비정규직 조합원 4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69.2%가 기간제 고용기간 확대에 반대했다.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논리 속에 비정규 노동은 기간제·시간제·파견에 이어 도급(용역·외주)의 형태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그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를 불안과 일상화된 차별에 신음한다. 임금 인상 등 처우 개선을 위해 한 여름에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설치·수리 기사들이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41일간 뙤얕볕 아래 농성하더니 한 겨울에는 에스케이브로드밴드·엘지유플러스 협력업체 설치·수리기사들이 원청 본관 앞에서 눈을 맞으며 파업 농성 중이다. 만연한 비정규 노동이 줄어들지 않는 한 장그래는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끝나지 않은 ‘그림자 권력’ 의혹


‘국정개입 문건’에 등장한 정윤회

정윤회 씨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부터 ‘정윤회’라는 이름은 유령처럼 박 대통령 주변을 맴돌았다. ‘비선 실세’, ‘그림자 권력’ 등의 말이 끊이지 않았다. 공적 의사결정 구조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데다, 누가 추천했는지 알 수 없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수첩 인사’를 이어간 박 대통령이 스스로 의혹을 키운 측면이 강하다.

급기야 세월호 참사 이후,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 논란이 될 때 ‘정윤회’라는 이름이 등장하더니, 12월10일 서울중앙지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1월28일 <세계일보> 보도로 불거진 청와대 보고서 한 건이 그를 불러냈다.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밝혀야 한다.” 정윤회(59)씨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검찰은 그를 대통령의 말처럼 “근거없는 찌라시”의 피해자로 만들어줬다. 결국 ‘정윤회 보고서’를 작성한 박관천 경정과 직속상관인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불장난’을 한 피의자가 됐다. 보고서에 등장한 ‘문고리 3인방’은 억울한 사람이 됐다.

온국민이 지켜봤던 ‘국정개입 의혹’ 문건의 결론은, 어느 누구도 국정에 개입한 적 없다는 것이다. “10년간 박 대통령 만난 적 없고, ‘3인방’과 연락한 적 없다”는 그는 ‘박지만 미행설’ 보도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안 받자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시켜 “전화 좀 받으라”고 했다. 대선 직후 박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전화 받은 게 전부”라는 그는 건재하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다원성 용납않고 보수색 강화


사상 초유 정당해산 박한철 헌재소장

박한철 헌법재판소 소장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진보당을 해산하고 소속 의원들의 의석을 박탈한 헌법재판소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 행정수도 위헌 결정 이후 10년 만에 다시 ‘가공할 위력’을 과시했다. 그 중심에는 검사 출신 첫 헌재 수장인 박한철(61) 소장이 있다.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판관으로 임명한 박 소장은 이동흡 소장 후보자가 낙마한 지난해 초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제5대 헌재 소장에 임명됐다. 그는 대검 공안부장 시절 광우병 촛불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고검장 승진에서 탈락했다. 서울동부지검장 때는 10억원대 아파트를 불교재단에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소장은 12월19일 결정 선고문을 읽기 전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는 공자의 말을 빌려 재판관들이 매우 정정당당하게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심판을 청구한 뒤 1년여 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헌재 재판관들은 해산 결정에 필요한 정족수를 2명이나 초과한 8(해산) 대 1(해산 반대)로 헌정 사상 초유의 정당 해산을 결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헌재는 우리 사회의 다원성을 용납하지 않는 보수적 성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동시에 헌재 재판관 구성을 다양화해야 헌법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새삼 일깨우기도 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세계적 이슈 된 ‘후진적 재벌문화’


‘땅콩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지난 12월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발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벌어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은 한국 사회의 후진적 재벌 문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줬다. 조 전 부사장은 승무원들을 무릎 꿇리고 폭언을 하며 서류철로 손등을 여러 차례 찌른 사실까지 알려져 사회 전반에 일대 충격파를 던졌다.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포스트>가 이 사태에 대해 “‘재벌왕국’의 단면”이라고 규정하며 한국의 재벌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땅콩 회항 사건은 세계적인 이슈로도 떠올랐다.

조 전 부사장의 경악스러운 처신은 재벌그룹의 최대주주 가문이 기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줬다. 조 전 부사장은 대한항공 전체를 자기 소유로, 임직원을 신분사회의 ‘하인’쯤으로 여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행동했다. 한자릿수의 매우 한정된 지분을 갖고 있을 뿐임에도 기업을 사유재산처럼 여기며 전권을 휘두르는 부적절한 행태는 한국의 재벌그룹 전반에서 지금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핵’으로 일컬어지는 재벌 회사들은 현재 창업자의 3세로 한창 경영 권력을 넘기고 있는 중이다. 이번 사건은 이들 재벌 회사에 던지는 엄중한 경고장이다. 경험 축적과 능력 검증 없이 재벌가 후손이라는 점만으로 회사 상층부에 곧바로 투입돼 경영에 참여하는 관행의 위험성을 날것 그대로 보여줬다는 점에서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영원한 루저는 없다’…화려한 패자부활


신고선수서 MVP 오른 서건창

넥센 히어로즈의 서건창 선수.


올해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서건창(25·넥센)은 ‘사상 첫 한 시즌 200안타 돌파’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웠다. 프로야구 출범 33년만의 대기록이다. 최다안타(201)·타율(0.370)·최다득점(135) 3관왕을 차지하며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단순히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패자부활이 좀처럼 보기 힘든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그는 인생역전을 입증해 보였다.

서건창은 스포츠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패배와 낙오가 더 익숙하다.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2008년 프로에 도전했지만 작은 체구와 부상 경력 때문에 어느 팀으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대신 테스트를 통해 엘지(LG)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신고선수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정식 등록되지 못하고 선수로 신고만 된 것을 의미한다. 엘지에서 단 1경기 만에 방출당한 서건창은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다시 넥센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서건창은 2012년 당시 주전 2루수 김민성의 부상으로 얻게 된 단 1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피나는 훈련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전 한화 소속의 장종훈에 이어 ‘연습생 신화’를 다시 썼다. 한 번의 실패를 빌미로 영원한 ‘루저’로 낙인찍는 사회에서 서건창은 패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웠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책임 팽개친 팬티탈출…기성세대 무책임 상징


승객 탈출 외면한 이준석 선장

이준석 세월호 선장


맨발에 트렁크 팬티 차림을 한 이준석(69) 선장은 가장 먼저 배에서 탈출했다. 수백명의 생명이 물에 잠겨가던 그 시각에 덜덜거리며 해경 함정에 오른 그를 두고 사람들은 ‘세월호의 악마’라고 불렀다. 배에서 탈출하라는 한마디 지시만 제때 했어도 가족들에게 돌아올 수 있었을 304명이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40년 동안 배를 탄 전문가다.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최고 관리자였지만, 그는 자신의 경력과 의무를 배반했다. 책임져야 할 위치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대타 선장’ 이씨는 여전히 그 책임의 무게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가라앉는 배에서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1심 법원은 지난달 그를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겠다는 뜻으로 징역 36년을 선고했다.

세월호 참사는 탈출 당시 그의 옷차림만큼이나 국가와 우리 사회의 무능과 무책임 또한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선사, 감독 기관, 선장과 선원들, 해경 중 어느 하나라도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그토록 많은 생명이 희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씨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며 기성세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 선장과 같은 무책임의 화신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사는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도 우리 국가와 사회는 모든 책임을 덮어쓸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