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26 21:19수정 : 2014.12.27 10:42

[토요판] 커버스토리
베트남 유가족 판반짜이씨 부녀

아직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유가족
세월호 최약자 이방인의 사연과 상처

▶ 한국 사회가 의도적으로 차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베트남에서 온 세월호 유족은 왜 자신들이 세월호 사건 수습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소외되어야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설명받지 못한 의문’은 불신으로 굳어져 한국 사회를 영영 오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세월호 유족을 한국 사회가 좀더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판반짜이’(고 한윤지씨 생부) 부녀와 한겨레가 나눈 대화를 전합니다.


“우리도 유족이고 사람…제발 의견을 물어봐주세요”

베트남에서 온 세월호 유족 판반짜이씨 부녀는 난생처음 이국 땅 한국에서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 다섯살 손녀 권아무개양은 살아났고, 딸 판응옥타인(한국이름 한윤지)씨는 주검으로 올라왔으며, 사위 권재근씨와 손자 권혁규군은 아직도 실종상태다. 지난 11월15일 경기도 안산시 다문화행복나눔센터 숙소에서 판반짜이(오른쪽)씨와 딸 판응옥하인(왼쪽·판응옥타인씨 동생)씨가 목숨을 잃은 판응옥타인씨와 꼭 찾기를 열망하는 권혁규군, 권재근씨(액자사진 왼쪽부터)의 사진을 들었다. 새해에 이들의 희망은 이뤄질 수 있을까.

판반짜이씨 부녀는 대체로 한국에 온정을 느끼고 있지만,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벽을 맞닥뜨리며 힘겨워했다. 가족이 죽어 쓰라린 상처를 보듬는 동안 누군가는 소금을 뿌려대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건너온 유가족이 아니었다면 한국 사회는 좀 달랐을까.’ 판반짜이 부녀는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

판반짜이 부녀의 숙소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의 다문화 행복나눔 센터다. 이들은 이곳 3층의 4평(13.223㎡) 남짓한 방에 8개월째 머물고 있다. 한겨레는 지난 18일과 11월15일 두차례에 걸쳐 이곳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눴다.


판반짜이씨는 딸이 한국인 권재근씨와 결혼할 때 찍었던 가족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가족사진 맨 왼쪽부터 아버지 판반짜이씨, 어머니 응우옌티응아씨, 고 한윤지씨, 남편 권재근씨(실종).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내가 너희들의 땀을 빼앗아 먹었구나’

“윤지는 정말 효녀였어요. 집안의 힘든 일을 늘 도맡아 하고 동생들을 잘 챙겨줬어요. 다섯살 어린 동생을 늘 제 품에 안고 잤어요. 엄마 아빠가 일하러 나가면 스스로 엄마 역할을 하던 아이였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엄한 아버지였어요. 말 안 들으면 회초리로 아이들을 많이 때렸는데 윤지는 딱 한번 맞았어요. 그렇게 야단칠 일 없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였는데….”

판반짜이(이하 짜이)씨는 딸 한윤지씨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설명했다. 한씨는 짜이씨 가정(3남2녀)이 얻은 첫째 딸이었다. 남자아이들만 계속 낳던 짜이씨에게 한씨는 복덩이였다. 짜이씨는 딸이 옥처럼 곱게 자라길 바라 이름 가운데 옥이라는 글자를 넣었다.(베트남어의 응옥(ngoc)은 한국어의 옥(玉)과 같은 의미로 발음도 비슷하다) 짜이씨 가족들은 베트남 남부 까마우성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아왔다. 한씨는 한국에 시집오기 전 떡을 팔면서 집안 생계를 보탰다고 한다. 한국 돈으로 하루 몇천원 벌이였다고 한다.

-따님께서 어떻게 한국인과 결혼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10여년 전 윤지가 호찌민시 봉제공장으로 가서 돈을 벌다가 한국인 결혼 중매업체를 알게 됐어요. 친구 따라 놀러 가듯 한번 가봤나봐요. 윤지는 당장 결혼할 마음은 없었는데 남자(사위 권재근)가 마음에 들어했다고 해요. 데이트를 했는데 윤지도 사위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대요. 윤지가 결혼을 하겠다고 남자를 데려왔는데 우리 집안의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음식도 잘 먹고 착하더라고요. 나이는 좀 많지만 총각이었고요. 그래서 둘이 잘 살아 보라고 결혼을 허락했어요.”

짜이씨는 인터뷰 내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듯한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펴진 것은 딸이 한국인과 결혼하던 과정을 설명할 때였다. 말하면서 처음으로 윗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왼쪽 아래에 하나만 남은 치아가 눈에 들어왔다. 손가죽은 어부로서의 고된 세월의 때가 묻어 검고 메말라 있었다.

딸과 사위는 꼬박꼬박 베트남 집에 생활비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 덕에 짜이씨 집안의 어려운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딸을 보러 한국을 찾은 3년 전, 그러나 짜이씨는 마음이 아팠다.

“저는 한국에서 사위가 돈을 잘 버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국 와서 보니까 사위는 매제 회사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한달 300만원 벌이였고 윤지는 집안 살림만 했어요. 그 돈으로 아이 둘 기르고 하려면 힘들 거 같았어요. 그런데 베트남 친정까지 챙겨왔던 거죠.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제가 사위와 딸을 불러 앉혀놓고 얘기했어요. ‘내가 너희들의 땀을 빼앗아 먹었구나’ 하고요. 윤지에게는 ‘집에만 있지 말고 맞벌이를 하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윤지 부부가 아파트 청소일을 하면서 함께 돈을 벌었어요.”

세월호 참사 직후 가족을 모두 잃고 팽목항에 홀로 남겨져 있던 아이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적 있다.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했을 때 볼을 어루만지며 직접 위로한 다섯살 권아무개양이다. 권양은 단원고 학생들에게 구조되었지만 부모와 오빠는 함께 있지 못했다. 권양의 오빠 혁규군은 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엄마를 모셔오겠다’는 마지막 말만 남기고 실종됐다고 한다.

권양의 가족은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사를 가던 길에 세월호를 이용했다. 권양의 어머니가 베트남 이주여성 한윤지씨이고, 외할아버지가 지금 한국에 머물고 있는 판반짜이씨다.

권양은 현재 고모가 보호하고 있다. 고모는 권양에게 ‘엄마와 아빠가 하늘나라에 갔고 하늘나라는 좋은 곳이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권양은 ‘좋은 곳에 왜 나는 안 데리고 갔어?’라고 묻곤 한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심리적으로 안정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권양은 가끔 외할아버지(짜이)와 이모(하인)를 만나러 안산에 오는데 엄마를 닮은 이모를 만나면 “껌딱지처럼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하인 “18일 오전 한국 대사관에서 저희 집으로 전화를 해왔어요. 언니가 죽었다는 거예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엄마와 함께 쓰러졌어요. 저희가 어떻게 한국에 갈 수 있냐고 물으니까 비자는 발급할 수 있는데 비행기표는 저희가 직접 사야 한다는 거예요. 한국에 가면 반드시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면서 일단 이웃들에게 돈 빌리라고 했어요. 220만원을 빌려서 한국으로 왔어요.”

베트남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한국 돈으로 10만원 정도다. 짜이씨 가족에게 220만원은 한국인이 느끼는 돈의 가치와 다르다.

-한국에 와보니 어땠나요?

하인 “진도에 도착한 게 4월20일이었어요. 진도는 엉망진창이었어요. 게다가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너무 답답했어요.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당황스러운데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없었어요. 조카 한 명만 살아남아 있었어요. 너무 마음 아파서 자꾸 쓰러졌어요. 링거 맞고 계속 누워 있어야 했어요.”



서울에서의 삶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간다던 판응옥타인
짐만 배로 부치고 비행기로
간다는 통화가 마지막 될 줄은
근데 왜 배, 배, 배를 탔는지

타인의 소식 알려준 한국대사관
‘비자 발급하지만 비행기표 알아서’
급히 돈 220만원 빌려서 와
사위와 손자는 아직도 실종상태
한국에 남아 참담함을 경험하다



“한 명도 구조 못한 것 이해 안 돼요”

-한씨의 주검은 언제 건졌나요?

하인 “4월23일이었어요. 진도체육관에 있는데 주검 수습 소식을 알려주는 전광판에 ‘한윤지’라는 이름이 나왔어요. 제가 ‘우리 언니다’라고 소리쳤는데 사람들이 베트남 말을 몰라서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다가 어떤 아저씨가 낌새를 채고 저를 구급차에 실어서 ‘주검 검안소’로 데려다줬어요. 거기에 언니가 잠자듯 누워 있었어요. 손을 만져보니 너무 차갑고 딱딱했어요. 언니에게 ‘왜 비행기 안 타고 배를 탔냐’고 물었지만 언니는 대답이 없었어요. 저는 다시 쓰러졌어요.”

짜이 “검안소에서 딸을 보고 저는 그냥 멍했어요. 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해주었어요. 그대로 딸을 업고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옆에서 주검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가족들이 빨리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다른 주검이 들어오니까 정리해야 한대요. 난 계속 딸의 주검을 안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내 딸을 건드리는 게 싫었지만 바깥으로 나와야 했어요.”

짜이씨가 머물고 있는 방에는 숨진 한씨와 남편 권재근, 아들 혁규군의 사진이 탁자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죽은 가족의 영정 사진을 절대 집에서 치우지 않는다. 집집마다 매일 또는 한달에 한번씩 영정 앞 단상에서 향을 피우고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 영혼의 존재를 강하게 믿는 편이다.

사진 옆에는 ‘찾아주세요. 저는 베트남에서 왔어요’라고 적힌 손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진도 팽목항에서 오랫동안 이 손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손팻말이라도 들고 있어야 한국 정부가 딸의 주검을 찾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족을 찾고 싶은 애타는 마음에 국경은 없다.

-한국에서 일부 사람들은 ‘교통사고 난 것을 두고 왜 정부를 비판하냐’고 유족들에게 불만을 제기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인 “그런 말을 한국 사람들이 했다고 들었어요. 화가 나요. 그렇게 큰 배가, 작은 배도 아니고, 뒤집어지면 죽는 게 작은 배인데, 세월호는 큰 배였잖아요. 기울기 시작했을 때부터 완전히 뒤집힐 때까지 몇 시간이 걸렸어요. 그사이 정부가 구조를 제대로 못한 겁니다. 이해가 안 돼요. 출동한 해경이 헬리콥터만 타고 빙빙 돌았다고 들었어요. 주변에는 작은 어선들만 있었고요. 해경이 왜 배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았나요? 선장도 다 도망가고. 해경이 얼른 배에 뛰어들어 사람들에게 선실에서 나와 바다로 뛰어나오라고 알렸다면 우리 언니도 살았을 거예요.”

짜이 “저는 그런 일 생기면 온 나라가 적극 구조에 나설 거라고 생각했어요. 왕의 말을 안 듣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박근혜 대통령이 적극 구조 작업을 지도하고 명령을 했다면 한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살아 돌아온 사람들 보면 모두 자기 힘으로 온 거잖아요.

정부가 한명도 구조하지 못했어요. 그게 저는 이해가 안 돼요. 한국은 대통령이 명령하면 목숨도 걸고 일하는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안 한 걸까요. 대통령이 적극 구조를 지시하지 않았나요?”


판반짜이 부녀(오른쪽)가 베트남어 통역을 맡은 응우옌응옥투옌(왼쪽 위)과 허재현 기자(왼쪽 아래)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통역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답답

박근혜 대통령은 4월17일 진도체육관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하며 “구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짜이씨가 진도에 도착한 것은 20일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고 갔는지 자세히 설명해주는 이도 없었다. 짜이씨는 그냥 한국 정부를 믿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추가 구조 인원 0명’이었다.

짜이 “2004년 베트남 까마우성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혀 39명이 죽은 적 있어요. 147명이 배에 탔는데 108명이 구조됐어요. 낡은 배가 무언가에 바닥이 긁혀서 아래가 터졌고 결국 뒤집혔어요. 구명조끼도 없었어요. 하지만 한국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이런 큰 사고가 난 건지 이해가 안 돼요.”

-한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이었나요?

하인 “통역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 너무 힘들었어요. 팽목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다른 유가족들은 어떤 남자에게 가서 말을 계속했어요. 그 남자가 구조 소식을 잘 아는 사람 같았어요. 저도 가서 말을 해봤는데 베트남 말을 전혀 못 알아들었어요. 그냥 24시간 우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화장실을 가든 샤워실을 가든 뭐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몰라서 너무 어려웠어요. 한국 정부가 통역을 붙여주긴 했는데 그분은 베트남 말은 잘하는데 한국어에 서툴렀어요. 그나마 그 통역은 우리 언니를 찾을 때까지만 도와주고 돌아갔어요. 그 후에는 어떤 베트남 유학생들이 와서 도와줬는데 계속 진도에 머물 수가 없어 하루나 이틀 있다가 돌아갔어요. 아예 통역이 제 옆에 없을 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누가 뭘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어 너무 답답했어요.”

짜이씨 가족은 유가족들 사이에 제대로 끼지 못했다. 권재근씨의 형이 권씨 일가 유가족의 대표로 정부를 상대했지만 짜이씨는 관련 내용을 잘 설명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권씨의 형에게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짜이씨에게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권씨의 형은 <한겨레>에 “서로 언어가 달라 유가족 논의 사항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다. 정부가 통역을 계속 지원해주지 않았다. 판반짜이씨로서는 섭섭할 수 있을 거라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11월11일 정부의 실종자 수색 중단에 합의했다. <한겨레>가 짜이씨를 처음 만난 것은 15일이었다. 그에게 정부의 수색 중단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바보가 되었군요. 우리는 오늘까지도 사위와 손자의 주검이 바다에서 올라오기를 바라며 이곳에서 사진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왜 우리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거죠?”

-수색 중단을 결정하는 유가족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하인 “우리에게 그런 회의가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없어요. 당신이 지금 말해주고 나서 저희가 그런 결정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어요. 우리는 뭐든 우연히 알게 될 뿐이에요. 형부가 죽고 우리 언니가 죽었어요. (언성이 높아지고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우리는 유가족이 아닙니까? 왜 한국은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거죠? 우리를 무식한 사람으로 보는 건가요? 그런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 우리에게 알려줬어야죠. 엄마가 며칠 전 저에게 ‘한국에서 실종자 수색 중단했다고 베트남 언론이 보도했다’며 전화를 해왔어요. 저는 그런 일 없다고 말했어요.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일 있으면 정부가 우리에게 뭔가 설명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짜이 “이제 겨울이니까 바닷물이 많이 차가울 거예요. 수색을 중단하는 것을 이해해요. 그런데 왜 그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까요.”

하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부에서 우리를 찾아오지 않아요. 아버지는 여기 와계신데 밥은 잘 먹고 있는지, 편찮으신 데는 없는지 그런 것을 한국 정부가 돌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 아버지는 지금 당뇨와 고혈압 때문에 힘드세요. 물론 좋은 한국 사람들이 저희를 돕고 계시지만 원래 이건 한국 정부가 할 일 아니에요?”

사실 한국 정부가 이들 가족을 위해 한 일은 ‘비자 발급’ 외에는 딱히 없다. 그나마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짜이씨 가족에게 전한 성금을 제주도청이 전달해줘 한국으로 올 때 든 비행기값을 해결해주었고 안산시청이 짜이씨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긴급 생계비 지원금은 짜이씨 손녀인 권양의 친가에 전해졌고 외가에는 없었다. 한국 정부는 실종자 수색 과정을 권양의 큰아버지를 통해 설명하고 협의했다. 짜이씨는 왜 자신이 모든 협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인지 의아하다.

“우리가 돈(보상금) 때문에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걸까요?” 짜이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 쓰라리게 아프다. 짜이씨는 이런 의심을 받을 때 그런 일을 겪는 듯 아프다.



“보상금 때문에 여기 있는 것
아니냐 의심하는 분들 있어요
이상한 핸드폰 메시지 받았어요”
짜이씨는 이런 의심을 받을 때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아프다

수색중단이 결정된 뒤에도
아무도 알려준 사람 없었다
기자를 통해서야 알았다
실종자 합동 영결식 소식도
나중에 전해듣고 거부했다



세월호 사건 이전 권재근씨 가족사진. 화목한 다문화가정이었다고 한다. 판반짜이씨 제공


“사위와 손자 찾아야 영결식 할 것”

짜이 “언젠가 모르는 사람이 우리에게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애(손녀 권양) 데리고 있으면서 보상 타먹으려는 거냐’고 묻는 문자였어요. 찍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없는 번호였어요. 너무 슬펐어요. 그냥 울었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권양은 현재 고모가 보살피고 있다. 짜이씨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을 자주 보지 못해 속상하다. 짜이씨는 이런저런 안 좋은 상상만 하게 된다. 한국 사회가 자신들을 왜 이렇게 대하는지 속시원히 말해주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없다.

짜이씨는 처음에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한국 언론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척 예민한 듯 보였다.

-한윤지씨의 주검을 찾았는데 계속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뭔가요?

하인 “(짜증스러운 얼굴로) 아직 저희 가족을 다 못 찾았잖아요. 조카랑 형부가 물속에서 아직 안 올라왔어요. 왜 계속 한국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는 거죠? 베트남 사람은 베트남 가족만 찾으면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건가요? 또 한국 정부가 언니의 가족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지도 봐야 하는 거잖아요. 조카 양육은 어떻게 결정되는지도 챙겨야 하고요. 그게 다 해결되어야 돌아가지요.”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하인 “엄마가 언니의 죽음을 한동안 믿지 못하셨어요. 언니의 주검을 찾았다고 설명을 드리면 그때는 이해하시다가 또 며칠 뒤 전화 와서 언니를 꼭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정신이 오락가락하셨어요. 최근에야 어머니가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어요.”

-머물러 보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하인 “한국은 선진국이고 발전한 나라 같아요. 아름다운 경치도 틈틈이 봤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상처도 받았지만 베트남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함께 있습니다. 한국을 나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짜이 “내 딸은 아직 젊은가 봐요. 저는 한국이 아무리 발전한 나라여도 이제 별달리 느껴지는 게 없어요. 딸이 죽어서 그저 슬프기만 합니다. 너무 슬픈데 나의 슬픔을 어디에 얘기할 곳이 없어요. 우리 가족에 대한 나쁜 소문 때문에 늘 억울함을 갖고 삽니다. 딸 생각이 나는 날에는 아직도 잠을 잘 못 잡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마당에 나가 담배 피우고 딸 생각을 하며 기도하고 돌아옵니다.”

한겨레는 11월15일 인터뷰를 한 뒤 지난 18일 짜이씨 가족을 안산에서 다시 만났다. 이들의 상태는 나아진 게 없었다. 이날 짜이씨 가족을 오랫동안 보살펴온 소설가 신혜진씨가 이들에게 ‘유가족들이 12월27일 실종자들의 합동 영결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는 언론 보도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짜이씨는 딸의 영결식이 치러진다는 것을 신혜진씨가 전하고서야 알았다. 그의 표정은 차가운 얼음처럼 냉랭했다.

“윤지는 제 딸이에요. 마음 아파요. 저는 한국과 같은 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사람인 건 맞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렇게 하는 거죠?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도 제발 의사를 물어봐줬으면 좋겠어요.”

짜이씨는 신혜진씨를 통해 영결식을 돕는 행정자치부 관계자와 유가족 대표 쪽에 딸의 영결식을 아직 치를 수 없다고 뒤늦게 알렸다. 세월호를 인양하고 그곳에서 사위와 손자의 주검을 함께 찾아 가족 모두 한꺼번에 장례를 치러야 하늘에서 딸이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짜이씨는 생각한다.


체류비자 만료는 내년 1월8일

한국에서의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들은 시민들이 모아준 성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제 세월호 사건에 대한 관심이 줄어 성금은 거의 끊겨가고 있다. 하인씨는 최근 하는 수 없이 안산 인근의 닭공장에서 몇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닭가죽을 벗기고 자르고 포장하는 일이다.

하인 “저는 칼이 있으면 그냥 심장을 찔러 죽고 싶은 심정이에요. 언니가 죽어서 슬픈데 제가 왜 이곳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저에게 왜 여기 계속 머물고 있냐고 자꾸 물어요. 너무 힘들어요. 저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 한국 사람들이 다른 한국 유가족에게 관심 갖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유가족으로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나마 이들이 버티는 건 시민들의 온정 덕이다. 지난달 서울 신림중학교 학생들이 44만4천원을 걷어 이들에게 전달했다. 그 돈을 보태어 이들은 겨울을 버틸 내복을 샀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게 무척 낯설다.

이들이 한국에 머물 수 있는 체류 비자 만료일은 내년 1월8일이다. 아직 한국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어 짜이씨는 불안하다. ‘비자 기간이 만료되면 쫓겨나는 거 아니냐’고 짜이씨는 신혜진씨에게 물었다. 신씨가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할 리 없다.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법무부는 이들의 체류 기간 연장을 검토하고 있다. 안산시청 외국인주민센터 관계자는 “짜이씨 가족의 체류 연장에는 큰 문제 없을 것”이라고 한겨레에 설명했다. 그러나 짜이씨가 답답한 것은 유가족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요구를 뭔가 한국 정부에 계속 부탁하듯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다. 정부가 세심하게 신경쓰지 않아 생기는 빈자리를 언제까지 시민들이 채워야 할까.

행정자치부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2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그간의 불찰을 인정한다. 판반짜이씨 가족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세월호 희생자 문제 처리 방식을 잘 설명하고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짜이씨 가족은 언젠가는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 베트남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물을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말을 전할까. 기자는 한윤지씨 부녀와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짜이씨는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마음껏 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안산/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통역 응우옌응옥투옌(중앙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