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26 18:48수정 : 2014.12.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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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출범하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내정된 이석태 변호사는 수차례 인터뷰를 거절했다. 엄중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설득 끝에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법무법인 덕수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한 그는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2014년 우리에게 봄은 없었다. 어쩌자고 꽃은 사방에서 그리 피어대는지.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 벚꽃, 라일락, 철쭉 꽃망울들이 시간차 없이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한꺼번에 터져 오르는 게 차라리 서글펐다. 어쩌자고 영정 속 아이들은 하나같이 꽃처럼 곱고 사랑스러운지. 사람들은 꽃구경도, 봄나들이 계획도 취소하고, 속죄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긴 줄을 지어 분향하고 노란 리본 위에 어린 영혼들에게 보내는 약속을 적어 걸었다. 올봄은 봄이 아니었다. 한겨울보다 시리고 추운, 정지된 시간들이었다.


이제 그만 세월호를 잊자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세월호에 대해서 한 게 너무 없다. 삼켜버리려 할수록 깊이 파고드는 생선 가시처럼, 이 끔찍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고서는 한 해를 온전히 갈무리할 수도, 새해를 기약할 수도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석태(61)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새해 1월1일부터 시행되는 세월호특별법에 따라 구성될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 내정자다. 현재 법무법인 ‘덕수’의 대표변호사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역임했고, 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과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시민운동에도 오랫동안 몸담아왔다. 그는 희생자가족대책위원회에서 투표인 243명 중 242명의 압도적 지지와 신뢰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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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세월호만의 문제일까” 의문에서 출발

-희생자가족대책위에서 뽑힌 상임위원은 전체 위원장을 맡게 된다. 위원장 권한을 공식적으로 갖게 되는 건 언제부턴가?

“지금은 위원장 내정자 신분인데, 조사위원 전원이 대통령 임명을 받으려면 아마 1월 중순쯤 되지 않을까.”

-출발부터 일정이 자꾸 미뤄지면 곤란한데, 위원회 법적 기한이 얼마나 되나?

“1년 기한인데, 그 안에 활동 완료가 안 되면 위원회 의결에 따라 6개월까지, 보고서 발간을 위해 추가 3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다. 합산하면 최장 1년9개월까지란 얘기다.”

-그럼 대통령 임명 받는 대로 활동 개시할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은 하고 있나?

“지금은 조달청에 임시사무실을 얻어서 준비단 작업을 하고 있다. 위원회 구성이 완료되는 1월 중순 전후해서 행정공무원들이 파견되면 전체 120명 인력의 절반 정도를 채울 텐데, 나머지 민간 인력은 공개채용을 거쳐 선발할 계획이다.”

조사위원회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각각 5명씩 국회 추천 10명, 대법원장과 대한변호사협회가 각각 2명씩 4명, 그리고 희생자가족대책위가 3명을 선출해 17명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새누리당 추천 인사 5명의 자질에 대해서 격렬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에서 활동하거나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한 전력이 있는 사람, 공안검사 출신이거나 세월호특별법 반대 의견을 게시한 사람들로, 이는 “위원회의 독립성”을 명시한 세월호특별법 4조의 취지에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의 진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세월호라는 게 어떤 사건인가? 그 어린 학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4월의 꿈같은 봄날 제주도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수장된 사건이다. 이건 정파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선출 과정에서 어떤 정당, 혹은 사상적 경향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세월호위원회에 들어오는 순간 세월호 참사의 성격 때문에 열심히들 힘을 합쳐 일하시리라 본다.”

-그럴까?

“그리고 세월호법에 아주 중요한 조항이 있는데 (서류를 뒤적이며) 제14조 ‘의사의 공개’ 규정에 따르면, ‘위원회의 의사는 공개한다. 다만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의사를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 그러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개하는 게 원칙이란 얘기다. 미국 속담에 ‘가장 큰 살균제는 햇볕’이란 말이 있는데 ‘공개’는 곧 햇볕이다. 국민들이 강력한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면 초기의 여러 가지 차이점들도 합리적 이성적으로 녹아들지 않을까.”

-요즘 우리 사회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은, 의사록 공개를 한다고 하면 오히려 보란듯이 더 충성경쟁을 하고 윗분의 총애를 받기 위해 첨병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합리적 이성적으로 대화에 응할 거라고 어떻게 낙관하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대안이나 방안을 마련하지 못해 문제가 지속된다면 그걸 잘 리드하지 못한 나의 책임이 될 것이다. 잘 풀려나갈 거라 보고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겠지만.”

-12월11일 희생자가족대책위와 함께 한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엔 제안을 받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앞섰다”고 말하셨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내 개인적 취향이, 맨 앞에 서기보단 옆이나 뒤에서 도와주는 걸 편하게 여기기도 하고. 근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참여연대 회의하러 (통인동에) 가는데 늘 광화문 전철역에 내려서 세월호 가족들한테 들렀다가 간다. 우리 사회의 약자, 뭔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 다가가는 걸 삶의 지표로 삼았던 사람이라면, 세월호야말로 그것의 총체가 아닌가. 우리 사회 거대한 슬픔의 집약체.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미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4월16일 사건이 났을 때 일반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 뉴스 속보를 봤을 때 진도 앞에 여객선이 침몰하는데 전원 구조되었다고. 그래서 놀라면서도 안도했는데, 조금 지나니 그게 아니라 거의 구조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의 말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끊겨버렸다. 북받치는 눈물을 삼키고 말을 이으려다가 다시 입을 닫기를 몇 차례. 카메라를 들고 있던 강재훈 기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사권, 기소권은 끝내 조사위원회에 부여되지 못했는데 검경 조사나 국정조사, 재판에서도 무엇 하나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진실을 조사위가 밝혀낼 수 있을까?

“수사권, 기소권은 없지만, 조사기관으로서 조사 대상자나 참고인에게 출석과 진술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필요하면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다. 또 어떤 단체에 대해서 국가기밀로 분류되지 않은 사항에 관한 한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도 있고, 청문회를 열 수도 있다. 조사 결과 범죄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엔 검찰총장에게 고발할 수 있고, 사안에 따라서 특별검사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엔 국회에 두 번까지 요청할 수 있다. 그러면 특별검사를 반드시 임명해야 하고 이 경우 반드시 기소해야 한다.”

-조사위가 특별검사를 요청한 사항에 대해 피의자를 불기소 처분으로 그냥 풀어줄 수는 없단 얘긴가?

“그렇다. 그리고 특별검사보가 그 진행 상황을 조사위원회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일부 언론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전원 구조”의 오보를 내더니 연달아 사건 본질을 호도하는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 선장은 왜 속옷 차림으로 하선했나, 유병언은 어디 있나, 왜 죽었나, 심지어 유병언 아들이 뭘 시켜 먹고 여성 조력자와 어떤 관계였는지 가십성 기사로 몰고 가는 동안 참사의 본질적 문제는 실종돼 버렸다. 어떤 각도에서 세월호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보나?

“이건 조사위에서 광범하게 논의할 사항이다. 개인적인 선에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이게 세월호만의 문제일까?’ 하는 일반적 의문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비슷한 날씨에 비슷한 배가 화물과 승객을 그만큼 싣고 갔을 때 또 그렇게 뒤집어지지 않겠느냐? 만일 그렇다면 그건 우리 사회의 일반적 근원적 문제다. 예를 들어 과거에도 고문경관의 문제가 있지 않나. 고문경관이 피의자 학생을 데려다 때리고 고문할 때 박종철처럼 죽었다면 그게 우발적인 사건인가? 그건 시대의 정치적 자화상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 같은 논리다.”



국회와 대법원장 등 추천 총 17명
가장 큰 무기는 의사공개와 국민
출석과 진술, 청문회까지 요구 가능
범죄혐의 인정되면 검찰에 고발
특검 필요 땐 국회에 2번까지 요청

위원장은 내게 그냥 직함일 뿐
스스로 조사관의 한 명으로 생각
내 옆에 그때 희생된 희생자들이
날 보고 있다는 생각 항상 한다
그게 내 기준, 언제 어디서나!



니어링 부부의 정직함, 존 롤스의 정의관

이석태는 말을 아꼈다. 그는 최소한의 주어-목적어-술어의 구조로, 무난한 용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비유나 형용사, 다양한 표현이 최대한 억제된, 건조하고 딱딱한 문장이었다. 행여 자신이 두드러지거나 돋보이지 않을까, 삼가고 또 삼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를 감동적인 웅변가이며 유려한 문장가로 기억한다. 20여년 전, 그의 재판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차분하고 강단 있는 목소리와 빈틈없고 집요한 법정 언술. 그의 변론은 사람을 나지막이 가라앉히면서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또한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처음으로 번역해 소개한 사람이다. 매카시즘의 광기와 자본의 탐욕에 대항해서 “조화롭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 가능하다는 걸 몸소 보여준 경제학자 스콧 니어링과 그 동반자 헬렌 니어링의 기록은, 97년 이석태의 번역을 시발로 국내에 연속 출판되면서 “단순하고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니어링 부부 같은 이들의 삶에 대해 로망이 있나? 주변 지인들 말로는 당신도 비슷한 생활을 한다고 하던데, 채식주의자에다가 절제된 생활….

“채식이야 뭐 (번역)전부터 하던 건데…. 동경하는 건 사실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저 한결같이 정직한 점.”

-한결같은 정직함?

“자기와 자기 밖 세계와의 조화랄까. 두 분의 사회적 활동도 존경하지만,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건 뭐랄까, 우주적인, 보다 근원적인 삶의 태도. 생과 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도 요즘 60대가 되니까 더 나이 들면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는 게 좋을지,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최근 <한겨레> 성유보 선생이 내 의뢰인이었는데 (유신시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재심 공판에서) 마지막 선고만 딱 남겨놓고 돌아가셨다. 재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뵙고 그 직전까지 점심도 같이 먹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결국 재심 선고 때는 ‘망자’(亡子)로 해서 무죄를 받았다. 그런 일 겪고 보니 더더욱, 내 마무리도 바로 옆에 있고,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적한 시골로 귀농해서 작은 텃밭으로 자급자족하며 산 니어링 부부와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 당신은 거대한 용광로 같은 이 도시에 살면서, 욕망과 갈등이 들끓고 얽히는 법조계에 몸담고 있다. 니어링의 삶의 무대와는 180도 다르다.

“근데 니어링 부부도 싸움의 장소를 자기 취향에 맞는 전원으로 옮겼을 뿐이지, 그 정신은 보다 치열한 사회현상 속에 두고 살았다. 책도 많이 쓰고.”

-정치를 해서 세상을 바꾸는 건 어떤가? 같은 사무실에 있던 송호창, 진선미, 이정희 모두 삼인삼색으로 정치권에 투신했는데. 정치하라는 제안을 받은 적 없나?

“나는 뭐… 정치와 친하지 않은 것 하난 분명하다.(웃음)”

-어떤 면에서 그런가?

“나는, 나를 가급적 내세우지 않는 데 ‘내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삶은 여전히 수수께끼와 같은데, 그런 내게 정치는 안 맞는다. 정치인이 되면 국회에서 싸우기도 하고, 자기 개인사를 파헤쳐서 내보이기도 해야 하는데 나한텐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오늘 같은 인터뷰도 난 굉장히 부담스럽다. 세월호 아니면 안 했을 거다. 그러니 나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아 달라.”

-사람들은 궁금할 거다. 조사위원장을 할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변호사로서 공직자로서 어떤 윤리를 가진 사람인지, 맡기면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러자면 개인 이력에 대해서도 여쭤보지 않을 수 없다. 외람되지만 자질 검증을 위한 시민들의 질문이라고 생각하시고….

“허어 참… 그거야 실제로 일을 하면서 보여 드려야지….”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가 내 질문에 드문드문 대답을 했다. 그가 신신당부한 대로 “그저 간단하게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1953년 전쟁 와중에 충남에서 출생, 이후 인천과 서울에서 성장, 경복중, 경복고를 졸업하고 72년 서울대에 입학해 화학과에서 3학년까지 공부하다가 “인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자퇴를 한 뒤 다시 시험을 쳐서 서울대 인문계열에 재입학했다. 원래는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는데, 군대 3년 동안 큰 좌절을 겪고 마음을 접었다. 구타와 꼼수가 일상이던 70년대의 군 생활에서, 제대할 때까지 “누구도 때리지 않고” “도둑질 안 한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가까스로 지켜냈지만, 인간정신과 우주섭리에 대한 열정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고민 끝에 다시 선택한 것이 법학이었다.

-법률가는 뭐 하는 사람인가?

“로스쿨 학생들을 만나서 하는 말이 있다. 법률가는 사회의 규범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데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따라서는 지배 권력의 하수인이 될 수도 있고, 보다 정의로운 쪽으로 규범을 움직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오죽하면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됐겠나?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언가?

“내 개인적으론…(곰곰 생각) 존 롤스의 정의의 개념이 마음에 든다. 분배의 균형이랄까. 사람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매우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걸 다 운이라고 보면, 그 반대의 운도 있다. 불우한 가정, 뛰어나지 않은 재능, 그래서 항상 먹고사는 데 쪼들리는…. 롤스의 교훈은 그런 운이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좌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우하거나 재능이 많지 않은 사람도 인생에서 커다란 좌절을 느끼지 않고, 우린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숙고할 수 있는…. 그러려면 운이 좋은 사람들이 가진 걸 나눠주고 분배해야 한다는 게 롤스가 말하는 정의다.”


2015년 세월호는 진실 만세!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인가?

“그런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서울대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서울대 출신이라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고, 변호사도 갈래가 많은데 어쨌든 지금까지 큰 과 없이 지내온 것도 큰 운이다.”

-새해를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2015년 신년 다짐 같은 게 있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장이 되니까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데, 그들이 뭔가 세월호라는 중요한 과제를 위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위원장으로서 좋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게 첫 번째 소망이다. 위원장은 내게 그냥 직함일 뿐, 나 스스로는 조사관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조사관?

“조사관. 내 옆에, 그때 희생된 학생들과 일반인 피해자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게 내 기준이다. 내가 혼자 있거나 뭘 쓰거나 항상 희생자들이 ‘이 변호사 제대로 하나?’ 지켜본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것.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언제 어디서나.”

강기훈이 91년 모략과 조작으로 구속된 뒤부터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기까지 23년간, 그의 곁에서 긴 모멸의 시간을 함께하며 끝내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힘도 거기 있을 것이다. “시종여일, 한결같이 정직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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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언론학 박사·희망제작소 부소장

우리 모두를 두껍게 에워쌌던 근거 없는 의심의 장막과 권력의 불순한 검은 그림자가 마침내 한 점의 그늘도 남기지 않고 거두어지고 물러 난 이 순간… 다 같이 피고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우리도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 만세!”(강기훈 재심 결심공판, 이석태 최후변론 중에서, 2014.2.16)


2015년을 좀더 힘내서 맞이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세월호도 이렇게 끝내야 한다. “진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