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23 18:48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나는 민주노동당 창당 무렵에 당명 결정, 강령이나 정책 만드는 작업에 약간 관여하다가 내부의 정파 다툼에 불편함을 느껴 그 이후로는 진보정당 운동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분당 사태 등 그 이후에 진행된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비판, 논평하지 않고 그냥 관찰만 했던 이유는 ‘행동이 따르지 못함’을 의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부 두 정파의 노선의 문제점에 대해 이미 1990년대 초에 입장을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었을 때 크게 환호했던 것도 사실이고, 탄압이 아닌 내부 갈등 때문에 의석을 확대하기는커녕 거의 자폭의 양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특히 제도권에 들어온 통합진보당 지도부의 노선과 행태에 크게 실망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중무장한 대왕개구리가 다 죽어가는 토종개구리를 상대로 우물 안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라 본다. 통합진보당의 시계가 5, 60년대에 멈춰져 있다면, 이번 헌재의 시계는 유럽의 19세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멈춰져 있다. ‘종북’이라는 ‘기호’는 그냥 정치적 반대파를 ‘역적’으로 몰던 조선시대 수구세력의 담론과 유사하다.


‘비법률적인’ 용어까지 동원한, 제대로 된 논증도 없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종북파’의 위협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이 정권과 기득권 세력의 권력 상실의 두려움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가만 내버려 두더라도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 사라질 가능성이 큰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하고 국민이 선출한 통합진보당 지역구 의원들의 의원직 박탈까지 하는 무리수를 둔 이유는 북한과 통합진보당이 실제 국가에 위협적이라서가 아니라 현재의 여야 정치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정치지형, 분단/내전 상태가 만들어낸 극히 편향적인 담론, 정책 지형이 변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관된 정책이 있고 당비를 내는 진성 당원이 있고, 당원의 참여와 토론의 과정을 거치려 했던 점에서 과거 민주노동당과 이후 진보정당들은 오히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정당다운 정당이었다. 아마 한국이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이들 진보정당들이 소수정당이 아니라 다수당이 되었을 것이다. 헌재가 해산 결정 사유로 거론한 통합진보당 내부의 비리나 비민주적인 운영 역시 모르긴 해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도 그만 못하지 않거나 더 심할 것이다.


나는 땀 흘리며 살아가는 다수의 통합진보당 당원이나 지지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들이며 알량한 기술적 지식과 펜대만 굴리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헌재 재판관들보다 우리나라 경제나 사회 발전에 훨씬 더 기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그들이 바닥에서 쳐다본 한국 정치나 정당, 국가는 전혀 믿고 의탁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보정당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통합진보당을 희생양 만들어 죽이고 나면, 현 집권세력의 정치적 위기는 순간적으로 모면되고, 이후 야당과 비판적 사회세력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섬나라인 남한의 정치와 사회는 단색으로 칠해진 꽉 막힌 암흑천지가 될 것이며, 국제사회에서는 더욱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자신의 ‘언어’와 지지할 정치지도자를 잃어버린 시민, 노동자의 좌절감과 정치적 무관심은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는 독소가 될 것이다. 이렇게 진보정당이 모두 사라질 경우 정치, 이데올로기 사상의 지형은 훨씬 좁아져, 일본처럼 보수정당의 독재가 고착화되어 정치적 다양성과 사회경제의 역동성이 사라지거나, 미국처럼 극심한 불평등과 폭력이 반복되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 이번 헌재 결정이 미칠 장기적 해악이 통합진보당의 해악보다 훨씬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북한 평화·통일, 심각한 불평등 개선과 노동자 권리 증대, 복지의 확충과 자영업자의 권리 보장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은 여전히 필요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된 것은 바로 사민당이나 노동당 등 진보정당이 오래 집권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