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8.13 21:53수정 : 2014.08.1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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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족의 기다림 13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 이호진(사진 오른쪽)·김학일씨 등 도보순례단이 오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대전월드컵경기장 미사에서 전달할 십자가를 메고 대전 유성구 ‘계백로’를 걷고 있다. 대전 광주/연합뉴스

교황과 만나는 이들의 바람

“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더는 여기에 없는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시절이던 2009년, 고국인 아르헨티나의 젊은이 수백명이 숨진 나이트클럽 화재 참사 5주기 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는 실업으로 고통받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을 향해 “돈이라는 우상을 중심에 둔 경제 체제의 비극”을 말하기도 했다. 교황의 ‘관심’만으로 ‘해결’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14일 방한하는 교황에게 한국 사회가 보내는 기대치가 높은 이유다. 우리 사회가 풀지 못하는 갈등 현장의 목소리를 교황에게 먼저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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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세월호 유가족 “진실규명 바라는 우리 목소리 들어주세요”


■ 세월호 희생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13일 단식농성장이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다. 교황은 이곳에서 16일 시복미사를 집전한다. 김병권(50) 가족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우리는 참사의 진실을 알고 싶다.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다. 소중한 생명 하나하나가 충분히 존중되고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 대통령과의 대화가 2000m 앞에서 가로막힌 광화문에서 교황, 가톨릭 신자들, 국민들과 함께 우리의 뜻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교황은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세월호 유가족 30여명을 초청했다. 김 위원장 등 10명과는 비공개 면담도 할 예정이다.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는 정혜숙(46·단원고 박성호군 어머니)씨는 “온 가족이 시복시성 미사에 참여하기로 약속했었다. 교황을 뵙고 싶어 방한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4월16일에 이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힐 마음이 없어 보인다. 이런 고통의 시간을 겪는 건 우리만으로 충분하다. 다시는 하느님이 사랑하는 소중한 생명들이 탐욕의 제물이 되어 죽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로 31일째 물과 소금만 먹으며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단원고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47)씨는 “평화와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리의 약자를 보살피는 교황이라고 들었다.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했다. 그는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탐욕적인 세상, 부패하고 무능하며 국민보다 권력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부라는 인류 보편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고 우리 정부를 압박해달라”고 했다. 



위안부 할머니 “교황께서 위안부 문제 언급 해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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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의 기다림 같은 13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에서 강일출 할머니가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참석해 교황에게 선물할 돌아가신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옆에 앉아 있다. <못다 핀 꽃>이라는 이 작품은 김 할머니가 피해자의 한과 고통을 알리기 위해 1995년 4월 그렸다. 대전 광주/연합뉴스

■ 위안부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7명도 18일 교황이 집전하는 서울 명동성당 미사에 초대받았다. 이용수(86) 할머니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주시기를 교황 앞에서 무릎 꿇고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교황과 만날 기대로 잠도 설치고, 미사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할머니는 “백번, 천번 바라는 것은 일본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는 것뿐이다. 교황께서 힘써주시길 꼭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13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2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세계연대집회’(제1139차 수요집회)에서 만난 김복동(88), 길원옥(85) 할머니도 명동성당에서 교황을 만난다. 김 할머니는 “우리들은 가슴에 한이 맺혀 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통한 명예회복이다. 교황께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길 할머니는 “우리가 20년 넘게 매주 거리에 나와 목이 터져라 외쳐도 일본 정부는 응답이 없다. 세계적으로 존경받으시는 교황께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면 우리가 백번 말하는 것보다 울림이 클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길 할머니는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여전히 전쟁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늘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교황께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강정마을 주민 “무기가 평화 대체할수 없다는 메시지 기대”


■ 제주 해군기지 반대주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7년째 하고 있는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주민들은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이 주민들의 고통을 알리고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다. 특히 강정마을 활동가들은 2월부터 교황의 강정마을 방문을 호소하는 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기도 해 교황의 방한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18일 교황이 집전하는 명동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고권일(51·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씨는 “교황이 고난받는 장소에 한번 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우리 마을을 방문해주셨으면 했는데 조금은 아쉽다. 생명을 존중하고 인권을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말씀해달라”고 요청했다.


편지 보내기 운동을 벌였던 조약골(41)씨는 “한반도의 평화가 동아시아의 평화이고 세계 평화라는 점을 널리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해군기지 문제를 직접 언급하면 좋겠지만, 무기가 평화를 대체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이라도 직접 밝혀주면 좋겠다”고 했다.



밀양 주민 “국가의 폭력과 원전의 위험 경고해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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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주민 초고압 송전탑 건설 예정지인 경남 밀양에선 정임출(72), 최민자(60), 한옥순(67)씨 등 주민 3명이 18일 명동성당 미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모두 765㎸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지난 몇년간 송전탑 예정지 농성장을 지키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이다. 주민 3명 가운데 최씨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씨는 불교 신자이고 한씨는 종교가 없다.


정씨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은 천주교든 불교든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송전탑 건설 백지화를 위해 투쟁했던 것도 같은 차원의 일이었다. 우리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는 깨끗한 국토를 물려주고 싶다. 교황님께서 이를 한번이라도 언급해주시면 정말 고맙겠다”고 했다. 한씨는 “희망과 평화를 가져오시는 교황님의 얼굴만 봐도 힘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이계삼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밀양 주민들의 소망을 담은 ‘교황님께 보내는 편지’를 17일께 발표할 계획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폭력과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교황님께서 공식적으로 경고해주시길 희망한다”고 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결국 문제해결은 정치권의 몫”


■ 쌍용차 해고노동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아직도 186명의 해고자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명동 미사에는 김득중(44) 지부장과 문기주(53) 정비지회장, 김정욱(43) 사무국장 등 3명이 초대를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내세운 ‘쌍용차 국정조사’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됐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해고자와 그 가족 등 25명이 자살 혹은 질병으로 숨졌다.


김 지부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황에게 면담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문 지부장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과 가장 높은 산재율, 최악의 노동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우리 해고자들보다도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교황과 만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 사무국장은 “교황의 초대는 매우 감사한 일이고,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문제의 해결책은 우리 정치권이 내놔야 할 것”이라고 했다.


초청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도 교황 방문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한달 넘게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노숙투쟁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 희망연대노동조합 씨앤앰지부의 케이블텔레비전 설치 노동자 양근영(33)씨는 “낮은 곳으로 임하고 낮은 곳으로 향하라는 교황의 평소 말씀대로 고용과 생활임금 보장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송호균 박기용 김규남 기자, 밀양/최상원 기자, 제주/허호준 기자 ukno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