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20 21:19수정 : 2015.01.21 10:34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발생한 뒤인 지난 7일(현지시각) 밤 ‘혁명의 상징’인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촛불로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 구호를 만들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파리/EPA 연합뉴스

[르포] 바디우와 이택광이 본 ‘샤를리 테러’

비행기가 내린 공항은 이미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겨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다. 파리 시내로 가기 위해 버스를 잡아타고 지나가는 길에 유령처럼 하얗게 떠 있는 글자들이 여기가 샤를르 드골 공항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순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파리를 방문하기 위해 드나들던 공항이었지만, 샤를르 드골이라는 그 이름의 의미가 새삼스러웠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때문이었다. 이 잡지는 프랑스 전직 대통령 샤를르 드골의 죽음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가 다시 복간되었다. 다시 발간하면서 <하라-키리>라는 잡지 명칭이 <샤를리 에브도>로 바뀌었고, 그래서 ‘샤를리’가 샤를르 드골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이런 일치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드골과 <샤를리 에브도>는 서로 앙숙처럼 으르렁거렸지만, 프랑스의 오늘을 만들어낸 두 원인을 보여준다. 그 체제는 사춘기를 통과하던 내 또래들을 설레게 했던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이라는 영화에서 완벽하게 드러났다. 흥미롭게도 이 프랑스 영화에 등장한 프랑스 십대들은 미국 팝송을 듣고 코카콜라를 마신다. 캐나다 소설가 마가렛 애트우드가 젊은 시절 파리를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고 짜증을 내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프랑스에 미국 유행이 불어닥쳤다는 것, 표면적인 이유는 이것이었지만 구조적인 이유는 더 의미심장하다. <라붐>이 그려냈던 것들이야말로 ‘프랑스적 가치’를 만들어냈던 드골 체제의 종언을 시사하는 것이었기에 그렇다. <라붐>이 개봉할 당시, 겉으로 보기에 여전히 프랑스의 지식인과 미디어는 드골주의를 추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자유주의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드골은 한국으로 치면 박정희 같은 존재였다. 권위주의적인 통치자였지만, 한국에도 잘 알려진 보수의 ‘똘레랑스’라는 규범을 만들어 냈다.



샤를리 에브도 총격사건은
자본주의-갱스터 결합 ‘파시스트 범죄’
이슬람 과격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계급갈등 통해 배양된 것

정작 테러를 가할 생각이었다면
국민전선이나 극우언론이었어야지
왜 철지난 좌파잡지였는지…

프랑스 내부에서 발생한 범죄를
외부 탓으로 돌리는 오류 말아야
프랑스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에게도 호의적인 곳 아냐


테러 이후 <샤를리 에브도>가 펴낸 최신호 표지가 전시돼 있다. 표지에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는 슬로건을 들고 있고, 그 위에 ’모든 것을 용서한다(Tout est Pardonne)’는 글이 적혀 있다. 이택광 교수 제공

공공연하게 프랑스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유럽의 독자노선을 추구했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독일의 경제력과 프랑스의 군사력을 결합해서 단일한 유럽을 만들어내려 했던 정책은 당시 유럽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이익을 유포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라는 이유로 영국을 유럽연합에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드골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독자노선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하기보다 오히려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드골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미테랑이 집권하면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다. <라붐>은 바로 이 시기의 정서를 증언하는 영화인 셈이다. 따라서 드골 때문에 폐간되었다가 다시 복간된 <샤를리 에브도>의 문제도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다시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처음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소식을 들었을 때, 나에게 떠오른 생각은 ‘왜’라는 의문이었다. 정작 테러를 가할 생각이었다면, 평소에 악의적으로 이슬람 혐오증을 드러내던 국민전선 사무실이나 극우언론을 공격할 일이지, 왜 존재감도 미미했던 철 지난 좌파잡지에 총격을 가한 것인지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의 파리행은 이런 질문을 안고 시작되었다.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현장을 찾아가는 것일 테다. 지난 시리아 내전 때 이른바 ‘인도주의적 공습’을 지지했던 장 뤽 낭시와 논쟁을 벌이고, 다양한 저서를 통해 유럽의 대이슬람 정책에 대해 가장 명쾌한 입장을 견지해왔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를 만나서 의견을 듣고 싶기도 했다.


파리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정하고 그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의 부인 세실 빈터가 반갑게 맞아줬다. 몇 마디 덕담을 나눈 뒤 방문 목적을 듣자마자 이야기는 곧바로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주제로 들어갔다. 운좋게 바디우가 이번 사건에 대해 방금 완성했다는 초고도 훑어볼 수 있었다. 내가 휴대전화에 찍혀 있는 한국 외교부 문자를 보여주면서, 지금 파리 방문자들에게 테러주의보가 내려졌는데 의외로 조용한 것 같다고 말하자, “발언할 사람들만 발언하고 발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발언하지 않으니 조용한 것”이라고 세실이 말했다. 이민자들과 오랫동안 연대활동을 해온 세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지금 프랑스의 무슬림들이 침묵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내가 샤를리다”는 구호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이번 테러를 이슬람과 연결짓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고 봤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만화가들을 살해한 청년들이 아랍국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교육제도에서 성장한 ‘순수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테러로 인해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프랑스 자신이지 무슬림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렇게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왜 범죄에 가담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 사안일 수밖에 없다. 바디우는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을 자본주의와 갱스터 스펙터클이 결합해 있는 ‘파시스트 범죄’라고 명명했다. 말하자면, 이번 사건은 이슬람의 과격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 내재하고 있는 계급갈등을 통해 배양된 것이라는 뜻이다.


국민전선의 부상과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현상이다. 프랑스에서 계급갈등의 문제는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주민들 대부분이 하층계급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계급갈등이 종교의 외피를 쓰고 있는 까닭은 가난한 이주민들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명충돌론 따위로 단순하게 환원시킨다면, 프랑스 내부에서 발생한 범죄를 외부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않겠는가.


바디우는 아프리카 이주민 아들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데, 평소에 그의 아들이 체험하는 프랑스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곳은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로서 아들을 키워온 세실의 불만은 컸다. 얼마 전에 아들이 세실을 대신해서 자동차를 고치러 정비소에 갔는데, 훔친 차가 아니라 진짜 자기 차가 맞는지 증명하기 전까지 고쳐줄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백인이었다면 그런 부당한 대접을 했을 리 없다는 말이다.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집중적으로 표출된 계기는 부르카 논쟁이었다. 프랑스는 법으로 공공장소에서 무슬림 여성이 부르카나 히잡 같은 베일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명분은 ‘세속주의’였지만, 개인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는 반발도 거셌다. 얼마 전 한국에서 통진당 해산을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상기해보면 이 문제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위반해야 하는 아이러니와 유사한 문제가 부르카 착용 금지 논란에도 숨어 있다.


바디우는 길게 프랑스 공화주의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거론한 인물은 파리 코뮌을 진압했던 쥘 페리였다. 공화국의 이름으로 2만명이 넘는 파리 코뮌 가담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장 폴 사르트르가 후일 ‘정치적 무의식’이라고 언급한 프랑스의 분열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페리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분열을 보았던 사르트르가 놓친 지점은 페리가 공화국의 복원을 위해서 식민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화국은 분열하지 않고 통합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식민지 노예들 덕분이었다. 공화국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의 자리를 식민지 노예들이 채웠다.


이번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호명된 프랑스의 공화주의 역시 이런 기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바디우의 생각이었다. 문득 파리 시청에 걸려 있던 현수막이 떠올랐다. “파리는 샤를리다”, “우리는 샤를리다”라는 커다란 구호 아래 “<샤를리 에브도>, 파리의 명예시민”이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과연 저 선언이 지칭하는 ‘파리’와 ‘우리’에 식민지 노예들과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을 그 후손들은 포함되었던가. 오히려 그 후손들은 ‘파리의 우리’로서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했다기보다, 잠재적 범죄자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미개한 야만인으로 낙인 찍히면서 ‘합법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배제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샤를리 에브도>의 ‘공허한 좌파주의’도 한몫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디우는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를 일컬어 1960년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당시에 성해방이나 신성모독처럼 모든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는 것은 급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60년대의 급진성이 백인 중산층의 기호품에 머물 때, 그 풍자의 화살은 과녁을 잃어버린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주민들이나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문화나 종교를 소재 삼아 풍자하는 만평에 즐거워하기는 어렵다. 과거 한국인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진출한 박지성 선수를 리버풀 관중들이 ‘개고기 먹는 족속’이라 조롱했다고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샤를리 에브도>를 즐기지 못하는 아프리카 이민자나 무슬림을 ‘미개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취향을 결정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너무 쉽게 간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말하면, <샤를리 에브도>는 오늘날 대의를 상실해버린 유럽 좌파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상에 가깝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테러를 당해 마땅하다는 주장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파시스트적 범죄”는 약한 고리를 노리고 타격을 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결코 강한 존재가 아니었고, 그 때문에 테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슬람 과격파들이 얻을 정치적 이득은 분명하다. 유럽 내부에 있는 반무슬림 정서를 강화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처음에 품었던 의문을 많은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바디우의 지적처럼 이 사건은 종교갈등이라기보다 계급갈등이라는 자본주의의 보편성으로부터 초래된 프랑스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에 가깝다. 이번 테러를 표현의 자유 문제나 종교갈등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작 배경에 놓인 정치적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대화를 마칠 무렵, 한국인 청소년 한 명이 터키에서 실종되었고 이슬람무장단체에 가입한 것처럼 보인다는 뉴스 속보가 휴대전화 알림 메시지로 떴다.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로 나서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무심하게 파리는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파리 이택광/문화비평가·경희대 교수



바디우는 프랑스 철학계 거장…이택광은 대중문화·정치 비평가

왼쪽부터 알랭 바디우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 명예교수, 이택광 경희대 교수

알랭 바디우(사진 왼쪽)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 명예교수는 철학자다. 자크 데리다 사망 이후 프랑스 철학계의 마지막 거장으로 꼽힌다.


바디우의 일관된 화두는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혁명적 해방의 사유’다. <논쟁>(Polemics) 등의 여러 저서에서 유럽의 일방적이고 문명중심적인 다문화주의와 대이슬람 정책을 비판했다. 장 뤼크 낭시와 시리아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택광(오른쪽) 경희대 교수는 미술과 영화, 대중문화와 정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문화비평가다. 영국 워릭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셰필드대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문화이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마녀 프레임>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등과 공저서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가 있다.


바디우와 이택광은 2013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코뮤니즘 콘퍼런스’를 위해 2012년 처음 만나 생각을 교류해왔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