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1 19:15

진상조사 요청에 정부 묵묵부답
‘명부’ 발견 뒤 두번째 유족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 줄 알았다. 1998년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호소문을 보냈지만 요식적인 답장만 왔다. 노무현 정부 들어 출범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도 2005년 진상조사를 요청했으나 ‘조사 대상’이 아니란 이유로 기각당했다. 23년 9월1일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6천여명의 재일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된 ‘관동대학살’ 때 큰아버지를 잃은 김대원(사진)씨는 결국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 채 지난해 3월 88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저희는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문에 참사를 당하여 희생된 유가족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취급하는 주무부서가 없습니다.”


지난달 26일 국가인권위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추진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김대원씨의 며느리 한정덕(59)씨는 “시아버지께서 생전에 늘 말씀하시길, 할머니가 죽은 큰아들 대신 왔다며 ‘대원’이라고 부르면서 당신을 끔찍히 아끼셨다고 했다. 그래서 한평생 당신 일처럼 정성을 쏟으신 것 같다. 유엔, 청와대, 외교부 등 찾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살아서 맺힌 한은 죽어서야 풀렸다. 2013년 11월 국가기록원이 주일한국대사관 이전 도중 발견됐다며 290명이 등재된 학살 피해자 명부를 공개했다. 학살 90년 만에 국가에 의해 공개된 첫 기록이었다. 이 명부에 큰아버지 김광진씨도 들어 있었다. 이로써 김대원씨는 지난 1월 제주에서 첫번째 유족인 조민성(62)씨에 이어 두번째로 관동대지진 학살 피해 유족으로 인정됐다.

   

김광진씨는 20년 전남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 집성촌에 모여살던 선산 김씨 집안 청년 대여섯명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바로 다음날인 23년 9월2일 일본인에게 학살 당했다. 함께 갔던 선산 김씨 청년들도 함께 죽었다. 한씨는 “78년에 시집가서 음력 7월 스무이튿날(양력 9월2일) 제사를 모시러 갔는데 마을 곳곳에서 동시에 제사를 지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알고보니 관동대지진 때 다같이 돌아가셨더라”고 했다.


김종수 관동대지진 특별법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목사)는 “일본 군대와 경찰이 학살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데도 민간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통념 때문인지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한번도 일본에 책임을 요구하거나 진상 규명에 나선 적이 없다. 족보 등에 피해 사실을 기록해 놓은 유족들이 많다. 더 늦기 전에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 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주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