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 입력 2014.12.30 11:14


□ 방송일시 : 2014년 12월 30일(화요일)

□ 출연자 : 김영오 씨 (세월호 유가족)

[홍지명] 2014년 4월 16일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날입니다. 구조과정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까지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세월호 참사로 자식과 가족을 잃은 많은 유가족들의 눈물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사고 이전에 평범한 유민 아빠에서 사고 이후 46일 간의 단식으로 세월호의 참상을 알리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데 앞장 서온 김영오 씨가 지금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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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 네, 안녕하십니까. 유민 아빠입니다.

[홍지명] 단식 이후에 몸은 많이 회복됐는지 궁금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김영오] 건강은 좋아지고 있는데 아직 소화기능이 좀 약해서 하루에 두 끼 정도만 먹고 있습니다.

[홍지명] 그렇군요. 한때 몸무게가 46Kg까지 빠졌다는 얘길 들었어요. 지금 어느 정도 좀 회복이 됐습니까?

[김영오] 지금은 56Kg 나가고 있습니다.

[홍지명] 길렀던 수염도 이제 좀 깎으시고 쑥 들어갔던 볼 살도 많이 나와서 외견상으로는 많이 회복된 모습이라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에 다시 회사로 복직한다는 말씀 들었는데, 지금 그 과정을 밟고 있는 중입니까?

[김영오] 네, 오늘 아마 회사 면담하러 갈 겁니다.

[홍지명] 전에 계시던 회사로 복직을 하시는 거죠?

[김영오] 네, 복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니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서 몇 개월 더 휴직을 해줬으면 하는데, 회사에서는 이달까지 결정을 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복직할 건지, 퇴사할 건지.

[홍지명] 네, 46일 간 단식을 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순간까지 갔다고 볼 수 있는데,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처음에 단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였습니까?

[김영오] 7월 16일에 원래 특별법 마지막 협상하던 날이었거든요. 12일째까지 지켜봤는데 저희 유가족이 원하는 수사권과 기소권 또 여러 가지 법안이 하나도 통과되지 않고 묵살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작을 했던 겁니다.

[홍지명] 단식을 하면서 정말 배가 고팠다는 인간적인 번뇌와 고민들, 이게 사실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그런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영오] 처음 3일만 단식하면 특별법이 제정될 줄 알았지만 단식이 점점 길어지면서 두려웠습니다. 고통의 날은 갈수록 심해졌지만 유민이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사주고 싶었던 것, 이런 것들을 너무 못해준 게 한이 돼서 목숨이라도 내걸고 꼭 진실을 밝혀주고 싶었습니다.

[홍지명] 그런데 단식을 시작하고 그 과정이 연일 보도가 되면서 본의 아니게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논란들, 시비들이 많았습니다. 오해도 있었고요. 만약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김영오] 아마 다시 선택할 겁니다. 자식을 잃은 아비가 왜 죽었는지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는데 신상 털리고 정치적으로 폄훼하고 비하하고, 또 저희를 편 가르기 하고 종북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허나 저는 허위사실이기 때문에 항시 당당했고 지금 상황을 보면 8개월이 지나고 9개월째가 다 되어 가는데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해결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에 다시 단식을 하게 된다면 그때 유민이 곁으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할 겁니다.

[홍지명] 이번 세월호 참사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정부, 정치, 언론, 사회 전 분야의 여러 가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지적들이 많은데,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점이 많이 실망스러웠습니까?

[김영오] 정부를 비롯해 국회의 태도는 둘째 치고 제일 실망스러웠던 것은 언론이었습니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안 하는 것에 가장 실망스러웠고요. 또 언론이 진실을 보도했다면 국민들은 정부와 국회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안 하고 왜곡된 보도를 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제일 실망스러웠습니다.

[홍지명] 예, 이제 어렵게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특별법 제정에 일단 여야가 합의를 했고,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비롯해 배상 또는 보상 문제에 대해서도 정치권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아직 완전히 타결됐다고 볼 수는 없는데, 지금 이 상태에서 정치권에는 어떤 점을 주문하고 싶습니까?

[김영오] 우리 유가족들은 자식을 먼저 보내고도 이렇게 처절하게 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서 아이들한테 부끄러운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진상규명이 최우선이라는 것은 지금도 입장은 변화 없고요.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지금까지 실망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진상규명만을 위해서 다시 저희한테 실망을 안기지 말고 신뢰를 다시 줬으면 좋겠습니다.

[홍지명] 그렇군요. 지난 8월이었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인데 그때가 아마 단식 30일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영오] 34일째.

[홍지명] 34일째. 그때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직접 만나셨는데, 그때는 어떤 말씀을 나누셨던 겁니까?

[김영오] 지금 세월호 참사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 좀 해주시고 특별법 제정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홍지명] 교황님이 어떤 답변이 있었습니까?

[김영오] 교황님께서는 저희한테 말은 없었고요. 제 편지 받아 가시고 그리고 고개만 끄덕이시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화답을 해주셨습니다.

[홍지명] 등을 토닥이고 지나가셨군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유족들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남긴 메시지는 뭐라고 보십니까?

[김영오] 교황께서 하신 말씀이, 고통 받는 자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저는 남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관심으로 살아왔고요. 그래서 제 딸을 먼저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의 메시지를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남은 생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홍지명] 그렇군요. 그리고 지난달 듣자하니까 그동안의 이야기를 묶어서 '못난 아빠가'라는 책을 내셨다고 해요? '이제야 철이 드는 못난 아비입니다,' 이런 부제를 다셨다고 하는데, 책을 낸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김영오] 책을 낸 계기는 저에 대한 신상이 털리고 나서 많은 오해들이 있었고, 또 특별법이 보·배상에 대한 특례를 위한 법으로 오해를 너무 많이 하고 있어서, 제가 신상 털리고 나서 그게 아니란 걸 증거자료로 다 제출해도 언론은 한 번 비하해놨지만 그걸 두 번 다시 내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다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진실을 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냈습니다.

[홍지명] 네, 오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지금도 오해가 많이 있는 모양이죠?

[김영오] 예, 지금도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홍지명] 주로 어떤 부분의 오해입니까?

[김영오] 보상금을 받았지 않았느냐는 부분도 있고요. 그 다음에 양육비를 주지도 않았다는 얘기 있고요. 아무튼 정치적으로 나가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오해들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홍지명] 그러니까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얘기를 해도 믿어주지 않아서 책을 썼다는 말씀이시군요. 책에는 김영오 씨가 살아온 인생 얘기들을 쭉 쓴 모양이죠?

[김영오] 예, 빈곤한 생활을 했던 것부터 또 제가 남들보다 좀 학벌이 짧아요. 그래서 이런 내용까지 넣고 싶지 않았는데 진실을 담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썼습니다.

[홍지명]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인생에서 가장 달라진 점, 뭘 꼽을 수 있을까요?

[김영오] 제가 눈을 떴다는 것이겠죠. 유민이가 참 많은 걸 가르쳐주고 갔습니다. 전에는 세상이 올바르게 굴러가는지 지켜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유민이를 보내고 나서 이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홍지명] 세월호 참사 이후에 지난 8개월 동안 평생을 만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또 많은 희망들을 봤을 테고요. 어떤 사람, 어떤 일들이 기억에 남으십니까?

[김영오] 학생들이 굉장히 많은 희망으로 보였습니다. 단식할 때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많은 학생들이 앞으로 이 나라의 미래가 될 친구들이잖아요. 근데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기억해 줘서 저한텐 너무 큰 힘이 됐고요. 그리고 제가 단식할 때 맞은 편에서 어버이연합이라는 분들이 와서 특별법 반대집회를 매일 했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어떤 70이 넘으신 어르신께서 오셔서 무릎을 꿇고 큰절하고 통곡하고 우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런 사람들이 다 있는 것은 아니네, 우리가 못해서 세상이 이렇게 됐네. 그러면서 저한테 위로를 너무 많이 해주시고 갔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홍지명] 김영오 씨께서 구조작업에 참여한 잠수사분들께 해드리고 싶은 말씀 있습니까?

[김영오] 목숨이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이에요. 들어가는데 물살이 세서. 목숨을 걸고서 저희 아이와 어른들을 구해줘서 너무 고맙고,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홍지명] 혹시 그 잠수사분들과는 아직도 어떤 연락을 하고 지내십니까? 유가족대책위원회나 이런 쪽에서?

[김영오] 대책위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홍지명] 지금 팽목항에 실종자 가족들 몇 분이 아직 남아있다고 그래요?

[김영오] 예, 아직 남아 있습니다.

[홍지명] 혹시 선체 인양 부분에 대해서 유가족대책위원회 쪽에서 말씀이 나오는 게 있습니까?

[김영오] 저희 유가족은 선체 인양을 무조건 원하고 있고요. 왜냐면 선체가 곧 진실이거든요. 선체를 봐야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알 수 있는 거고, 선체 인양을 무조건 원하고 있습니다.

[홍지명] 지난 8개월 동안, 좀 다른 질문이긴 합니다만, 단식을 하고 또 사고 진상을 알기 위해서 이리저리 다니느라 아까 회사도 일단 휴직 상태라고 하셨는데,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신 겁니까?

[김영오] 생활비는 6월에 2,000만 원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출받고 지금 얼마 안 남아서 몇 개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홍지명] 그러니까 봉급이 나오지 않으니까 대출을 받았다는 말씀이시군요.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유민 양과의 생생하실 텐데, 다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렵겠지만 2014년을 보내면서 유민 양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김영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빠는 우리 공주 사랑하고, 또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진실이 꼭 밝혀져서 유민이한테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줘서 꼭 선물로 안겨주고 싶습니다.

[홍지명] 새해 소망도 결국은 같은 얘기가 되겠네요?

[김영오] 새해 소망은 지금까지 저희한테 실망만 안겨줬던 정치권이 이제 내년 한 해는 저희한테 실망 없이 신뢰 좀 쌓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홍지명] 예, 알겠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새해에는 김영오 씨도 건강 회복하시고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 시간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오] 예, 고맙습니다.

[홍지명]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 유가족,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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