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2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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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 문학은 ‘세월호’의 충격에 글과 몸으로 맞서면서 꿈을 놓지 않았다. 사진은 왼쪽부터 소설가 한강·성석제, 시인 이성복·안도현, 작고 시인 정지용·신석정.< 한겨레> 자료사진

2014년 문학계

‘세월호’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한 해였다. 말을 잃게 만드는 사태 앞에서도 작가들은 글을 써야 했고, 글이 막히면 몸으로 슬픔과 분노를 표출했다. 엄혹했던 유신의 한복판에서 태동한 한국작가회의는 ‘신 유신’의 광풍 속에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정지용과 신석정의 미발표 시들이 발굴되었고, 문인들의 타계와 투병 소식도 들려왔다.


세월호와 문인들의 대응

“지금 나라초상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상감마마 승하가 아닙니다/ 두 눈에 넣어둔/ 내 새끼들의 꽃 생명이 초록생명이/ 어이없이 몰살된 바다 밑창에/ 모두 머리 박고 있어야 할 국민상 중입니다”(고은 <이름짓지 못한 시> 앞부분)


<한겨레> 4월28일치에 실린 고은 시 <이름짓지 못한 시>를 필두로 강은교·백무산·신현림·안상학 등 시인들이 세월호 사태를 시로 울었다. 이들을 비롯해 시인 69명이 참여한 추모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가 책으로 묶여 나왔으며, 서울광장에서 열린 참사 100일 추모공연에서 유족들에게 전달되었다. 문인들은 정부의 세월호 사태 처리 방식과 누적된 부정·부패 등을 비판하는 성명을 754명의 명의로 발표하는가 하면 릴레이 단식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고, 9월부터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수를 가리키는 ‘304 낭독회’로 그 취지를 이어 갔다. 10월3일에는 소설가 김훈·김애란, 시인 송경동·김행숙·권현형, 평론가 권희철·양경언, 희곡작가 최창근 등 문인 20여명이 진도 팽목항을 찾아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었다.


외국소설 강세 속 한국문학의 분투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올 한해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꼽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도 베스트셀러 최상위를 오르내리며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다. 한국 소설과 작가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잘 팔린 책이 꼭 좋은 책은 아닌 법.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성석제의 <투명인간>은 올곧은 역사의식과 깊은 인간 이해로 문학의 본령을 다시금 확인시킨 역작이었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와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 김선재의 <내 이름은 술래>,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은 어리거나 젊은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삶과 죽음의 비밀을 한꺼풀 벗겨 보였다. 서정인의 <바간의 꿈>, 한승원의 <사랑아, 피를 토하라>와 <사람의 맨발>,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 최인석의 <강철 무지개> 같은 중진·원로들의 신작이 그에 보조를 맞추었다. 은희경의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 김경욱의 <소년은 늙지 않는다>, 백수린의 <폴링 인 폴>은 단편 미학의 폭과 깊이를 다각도로 보여주었다.


이성복은 1970, 80년대에 썼으나 책으로 묶지는 않았던 시들을 모은 책 <어둠 속의 시: 1976~1985>를 독자들에게 깜짝 선물처럼 내놓았다. 시집과 함께 나온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와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는 이성복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았다. ‘대책없는 낭만주의자’ 박정대가 시집 <체 게바라 만세>로 권위있는 대산문학상을 받은 일도 이채로웠다. 여성적 생명력을 거침없이 구가한 문정희 시집 <응>, 생태적 사유의 역설적 진보성을 강조한 이문재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조사가 주어의 자리로 올라서는 장관을 연출한 정끝별의 <은는이가>, 고통과 슬픔의 연대를 모색한 김행숙의 <에코의 초상>, 언어의 자율적 존재와 운동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이제니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의고적 어투로 독특한 효과를 낸 김근의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퀴어 정체성을 장르적 문법에 실어 나른 김현의 <글로리홀> 등도 기억할 만했다.


글을 쓰기만 할 뿐 책으로 묶어 내는 데에는 뜻이 없어 보였던 원로 평론가 도정일이 칼럼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를 내놓아 그의 책을 기다려 온 독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시를 쓰지 않는 시인 안도현은 <한겨레>에 연재한 짧은 산문을 모은 <안도현의 발견>과 1930년대 시인 백석의 삶을 재구성한 <백석 평전>으로 글쓰기의 갈증을 달랬다. 윤대녕이 지나온 공간들을 글로 되살려낸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시인 마종기와 가수 루시드폴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 2탄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평론가 이광호의 용산 산책기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와 소설가 강석경의 경주 이야기 <이 고도를 사랑한다>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문학의 정치성을 파고든 시인 진은영의 논문 모음 <문학의 아토포스>, 소설가 김연수의 ‘작업’ 고백 <소설가의 일>, 평론가 신형철의 영화 이야기 <정확한 사랑의 실험>도 올해의 산문으로 꼽을 만하다.


추모시와 낭독회, 현장 방문까지
안 팔려도 제몫 다한 시와 소설
정지용, 신석정 미발표 시 발굴

 

기념과 발굴

1974년 11월18일 문학인 101인 선언으로 고고성을 울린 한국작가회의가 출범 40주년을 맞았다. 작가회의는 <한국작가회의 40년사>와 원로 문인 회고록 <증언: 1970년대 문학운동> 두 단행본으로 40년 역사를 기리는 한편, 11월22일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젊은 회원들이 작성한 ‘젊은 문학 선언’을 통해 창립 정신의 발전적 계승 방향을 밝혔다.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를 테마로 삼아 개관한 경북 청송 객주문학관에서는 한국과 중국 문인들이 참여하는 제8회 한중작가회의가 6월에 열렸으며, 한국문학번역원이 주관하는 2014 서울국제작가축제는 한국과 해외 작가 28명이 참가한 가운데 9월 하순 서울과 제주에서 행사를 치렀다.


정지용이 일본 교토 유학 시절인 1920년대 중반에 발표한 시와 산문 40편이 <한겨레>를 통해 새롭게 확인된 일과 ‘전원 시인’ 신석정이 해방 공간에 써 놓고도 발표하지 않았던 진보적·참여적 시 13편이 역시 <한겨레> 지면을 통해 처음 공개된 일은 한국 문학사를 새롭게 쓸 필요를 제기했다.


타계와 투병

출판인이기도 했던 김종철 시인이 7월5일 타계했다. 암 수술 뒤 상태가 호전된 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아 여러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터여서 안타까움이 더했다. 황지우와 함께 1980년대 해체시의 양날개로 꼽혔던 박남철도 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른 죽음을 맞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네이딘 고디머 역시 역사로 편입되었다. 작가 복거일은 에세이 형식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에서 암 발병 사실을 밝히고 수술 치료 대신 글쓰기를 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소설가 이외수도 위암 발병과 수술 및 항암 투병 과정을 에스엔에스에 공개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