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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자 연행

국군에 의해 김포 하성면이 수복되자 각 마을의 치안대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가금리 주민 김순명 등 마을 주민 10여 명은 1950년 9월 말경 가금1리 송00에게 끌려가 가금리 치안대 사무실로 쓰인 조제원의 집에서 매를 맞았다. 그 다음 날 김순명을 제외한 주민들은 모두 풀려났으나 김순명은 하성지서로 끌려갔다. 이 무렵 가금리에 피신해 있던 마곡리 주민 여이현과 마조리 주민 권동규도 치안대 민00에게 잡혀갔다.

마조리에서 주민들이 끌려가는 모습은 참고인 민경성과 권세옥이 목격하였다. 그들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치안대원 민봉기 등이 마조2리 주민 30여 명을 양손을 묶은 채 잡아 와 민경성의 아래 집 마당에 앉혔다. 그리고 민00가 집에 들어와 작은 소총(칼빈총으로 추정) 개머리판으로 마루를 쾅쾅 치면서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그 뒤 치안대원들은 마조리 주민 권계성(마을에서는 권남규로 부름), 민성남(민만기로도 부름) 등을 하성지서로 끌고 갔다.

고양 벽제면 성석리에서 치안대 활동을 했던 이각은 마곡리 주민 민병택과 친인척 사이였는데, 민병택이 연행될 때의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각은 인민군 점령기에 하성면 배급소에서 일했던 민병택이 국군 수복 후 피신하기 위해 고양 벽제면 성석리로 오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후 민병택은 이각의 집에서 땔감 나무를 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초순경 고양 벽제면 치안대장 홍기세가 민병택을 보고 신원을 알 수 없으니 김포에 가서 증명서를 받아오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민병택은 "매부가 하성면 청년단 단장이니까 그 사람에게 얘기하면 증명서를 해 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각에게 김포로 다녀오라고 했다. 이에 이각이 김포 하성면 치안대장으로 있다는 남궁씨(남궁준으로 추정됨)에게 사정을 말하고 증명서를 해 달라고 하였더니 이 말을 들은 남궁씨는 바로 김포 하성면 치안대원 2명을 이각의 집으로 보내어 민병택을 잡아오라고 하였고, 이각을 따라 온 김포 하성면 치안대 2명이 민병택을 체포하여 김포로 떠났다. 민천기의 증언에 따르면 민병택이 하성면으로 끌려온 때는 1950년 11월 10일(음력 10월 1일)이었다.

한편, 민병택이 피신해 있는 동안인 1950년 10월 29일경 하성면에서는 민병택의 모친 조원순, 딸 민진기, 민군자가 치안대에 의해 끌려갔으며, 아들 민봉기는 1․4후퇴 직전에 고모부 남궁준(대동청년단장이었다고 함)의 집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게 잡혀갔다.

마곡리 강범수는 국군 수복 직전인 1950년 9월경 개풍군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전쟁 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치안대 민근식이 찾아와 “살려 줄 테니까 고향으로 돌아가자”라고 설득하여 하성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치안대에 의해 매를 맞고 하성지서에 감금되었다. 그는 하성지서에서 고문을 받으며 부역자 명단 작성을 강요받았다. 참고인들 증언과 제적등본의 사망신고일로 보아 강범수가 연행되던 때와 같은 시기에 그의 친인척 36명 중 동생 강창수(1922년생)․강봉수(1934년생), 사촌 강갑수(1923년생), 삼촌 강영근(1917년생)이 하성지서 창고로 연행당했으며, 나머지 노인, 여성, 어린이 등 32명은 1․4후퇴 직전에 연행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범수는 하성면 강씨 집안의 장손이었는데, 그가 피신해 있는 동안 그의 부친인 강영규 가족과 그 형제 가족들, 그리고 본인의 형제 가족들, 사촌들이 모두 연행되었다.

유족 강건수의 증언에 따르면, 영등포에서 하성면으로 피난 와 있던 강복성의 가족도 9․28수복 직후 함께 하성지서 창고로 연행되었는데, 인민군 점령기 숨겨주었던 영등포경찰서 지서장이 이 사실을 알고 도와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들은 풀려난 직후 영등포 옛 집으로 돌아갔는데, 친척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말을 1951년에 전해 듣고도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63년경에서야 재산 상속 문제를 처리하라는 연락을 받고 하성면을 방문하게 되었다.

2. 감금 및 고문

끌려 온 주민들은 하성면사무소 뒤 두 개의 가마니창고에 감금되었다. 당시 두 창고에는 각 30여 명씩 모두 6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감금된 지 7일에서 10일 후 대부분 살해되었다.

유족 권금자는 당시 모친의 등에 업힌 채 부모와 함께 창고에 갇혀 있었는데, 나중에 그의 모친으로부터 부친 권동규가 매일 창고 밖으로 끌려 나가 “잘못을 대라”고 하면서 매를 맞았으며 여성들의 경우에는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발가벗겨서 때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창고는 20여 평 크기로 남녀구분 없이 감금해 놓고 있었고 구금자들을 수시로 끌고 나가 때렸으며 창고 안에서도 때리기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3. 집단살해와 시신 수습

김충흠의 모친은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가금리 김순명의 밥을 매일 날랐는데, 밥을 나른 지 10일 즈음 지난 10월 20일 창고에 가 보니 갇혀 있던 주민들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창고 보초를 서던 자들이 “이제는 밥을 받아 잡술 분이 없다. 누가 데리고 갔다”라고 하였다.

마곡리 민병택의 가족들도 하성면사무소 앞 치안대사무실 창고로 끌려가 5일 정도 갇혀 있다가 1950년 11월 3일(음력 9월 24일) 지금의 태산가족공원 맞은편 야산 숲 속에서 살해당했다. 민병택은 장소가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 1950년 11월 14일(음력 10월 5일) 총살당했다.
인민군 점령 초기 김포군 인민위원장이었던 석탄리 어수갑은 국군 수복 후 치안대의 체포를 피해 어씨 집성촌이 있는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로 피신했으나 결국 고양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다.

마조리 주민 권동규, 민남기 등은 1950년 10월 20일(음력 9월 10일) 저녁 10시경 치안대에게 끌려 나가 하성면사무소 뒷산인 태산에서 살해당했다. 권동규는 창고에서 끌려 나가면서 함께 창고에 갇혔던 자신의 처에게 “나한테 매달리면 매를 맞게 되니까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며 나갔다고 한다.

유족 민경완은 석탄리 강변의 희생현장에서 살아나온 전류리 주민 김동길로부터 이 사건의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아래 창고에 갇혔던 김동길은 “치안대가 밖으로 나오라고 하자 김포경찰서로 가는 줄 알았는데, 다 묶어가지고 달밤에 하성면 석탄리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큰길로 가지 않고 돌아가나 보다 했는데 가다 말고 강변에다 묶은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을 쏴 댔다”라고 하였다. 김동길은 당시 함께 끌려가 총살당한 주민들이 아주 많았으나 석탄리 한강변의 강 물살이 아주 강해 그 시신들이 다 떠내려갔다고 하였다. 김동길도 강에 빠졌으나 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풀을 붙잡고 있었는데 치안대원들이 생존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김동길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 살게 되었다. 사건 당시 김동길과 함께 전류리 주민 김영재도 생존하였다. 그러나 김영재는 나중에 다시 잡혀서 태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하성면 주민들의 희생은 국군 수복 후부터 1․4후퇴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치안대 활동을 했던 참고인 황00는 “(부역혐의자를 죽이는 일은) 3~4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때 하성면 주민들뿐 아니라 외지인들도 죽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증언을 종합하면, 마곡리 강씨 일가 중 국군 수복 직후 연행된 강범수 외 4명은 태산골짜기 또는 석탄리 강변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외 다른 가족들 32명은 하성지서 옆 창고에 갇혀 있다가 1․4후퇴 직전에 하성국민학교 뒤에서 집단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황에 대해 당시 하성지서 경찰관이었던 이00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4 후퇴 때 여기 창고에 김포면 전체에서 잡아 온 사상불순자가 남았더랬어요. (후퇴할 때) 그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갈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김포까지 차로 어떻게 다 데리고 가느냐, 안 되겠다, 그래 가지고. 하필이면 하성으로 들어와 가지고. 하성국민학교 뒤에서 갑자기 그냥. 급하니까. M2같은 총으로다 바바방 하고 얼른 쏘고 내뺐지요.“

김충흠은 희생자들이 끌려 나간 날 저녁에 태산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민경성과 함께 유골을 찾고 있었는데, 2001년  태산골짜기에서 유골과 유품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민경완에 따르면, 모친이 민성남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1․4후퇴 직전 태산골짜기에 왔으나 시신들이 서로 엉켜 있어서 민성남의 시신을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2001년 하성지서 뒷산에 태산가족공원이 만들어지면서 희생자들의 유품과 유골 등이 발굴되었다. 이로써 하성지서 뒷산에서 하성면 주민들이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때 발굴된 유골 등은 하성면 유족인 민경성, 김충흠 등에 의해 태산가족공원 내 골짜기에 수습되어 가매장되었다.

사건 당시 김포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박00은 “하성면 태산골짜기에서도 여러 사람이 희생된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하성면 주민들이 희생된 곳은 석탄리 한강변, 하성국민학교 뒤 창고, 태산 건너편, 태산 뒤 골짜기, 하성성당 골짜기 등 모두 다섯 곳이다.(출처, 김포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