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군에서는 전쟁 전부터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활동도 활발하였는데, 고촌면 임0석은 대한청년단 고촌면단부 부단장, 임0일은 신곡리 영사정동단부 단장, 이0선은 향산리 하향산동단부 총무, 윤0섭은 고촌면단부 감찰부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김포를 점령하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대한청년단원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의 협조를 강요당했다. 고촌면에서는 임0석, 임0일 등이 고촌면 조국보위위원회 서기장과 조국보위위원회 위원, 이0선은 면 자위대장, 윤0섭은 면 자위대 부대장으로 부역 활동을 하였다.

9·28수복이 되자 고촌면에서는 고촌지서 김0창(金0昌) 순경 등 여러 명이 선발대로 도착했으며, 그들은 고촌의 유지인 임0석, 임0일 등의 협조를 받으며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하였다.

국군 수복 후 치안대원들의 체포를 피해 숨어 지내던 신곡리 주민 장문숙(당시 한강 정수장에서 근무함)은 1950년 10월 1일경 고촌지서로 연행당했다. 천주교 고촌공소 창립자 송해붕도 부역했다는 모함을 받고 천주교 신자의 집 벽장에 며칠을 숨어 지내다가 1950년 10월 10일 오후 3시 치안대에게 발각되어 임0석 등에게 끌려가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갇혔다. 목격자에 따르면, 당시 창고에는 주민 수십 명이 갇혀 있었는데, 신곡리 주민 외에 전호리, 풍곡리, 향산리의 주민들도 많이 잡혀와 있었다. 주민들이 갇혀 있는 모습은 송해붕의 제자 임병열이 치안대 심부름을 하면서 목격하였다.
같은 시기 연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곡리 이경창 가족·윤희용·김기산·이태하·윤섭, 향산리 기곽도 가족은 목격자가 없어 구체적인 연행경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임범일 등 치안대원들은 연행한 주민들을 고촌지서로 끌고 갔다가 고촌면사무소 옆 양곡창고에 감금했다. 양곡창고 인근 주민들은, 그 무렵 치안대가 연행한 주민들을 때리는 소리와 고문당하는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송해붕을 면회하기 위해 창고를 방문했던 그의 제자 임병열은 창고 앞쪽에서 송해붕을 만났으며, 이때 창고 안에 함께 갇혀 있던 20여 명의 주민들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그 후 임병열 역시 천주교 지도자 송해붕을 따르지 말 것을 강요당하며 창고에 3일 동안 갇혀 거꾸로 매달리고 매를 맞기도 하였다. 임병열은 함께 창고에 갇혀 있던 다른 주민들도 전깃줄에 손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고 물고문을 당했다.

치안대원들은 창고에 갇힌 주민 중 일부를 김포경찰서로 넘긴다면서 새벽에 끌고 나갔다. 끌려 나간 사람들은 죽으러 가는지 모르고 갔던 것이었지만, 치안대는 이미 다 죽일 사람들만 뽑아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임병석 등에 대한 판결문에 따르면, 임0석 등은 송해붕과 김기산 외 여러 명의 주민들을 살해하기로 계획하고 1950년 10월 12일 0시경 각각 칼빈, M1소총, 권총 등을 가진 채, 창고에 있던 희생자들을 군용통신선으로 결박하여 김포경찰서 고촌지서 서쪽에 있는 천등고개로 연행하였다. 이들은 천등고개에 미리 만들어져 있던 미군용 참호에 끌고 간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각자 휴대한 총기로 일제히 20여 발을 발사하여 전원을 살해한 후 참호에 시체를 매몰한 뒤 유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살해는 1950년 10월 12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임병열 등은 “이들 외에도 천등고개로 끌려가 살해당한 주민들이 더 있었으며 군용 방공호가 깊어서 주민들을 여러 번 총살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 판결문의 희생자 외에도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1952년 송해붕의 시신 발굴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갇혀 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지서로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마을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송해붕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희생자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다.
송해붕의 경우도 희생된 지 2년이 지난 1952년에야 천등고개 야산(지금은 김포시 상수도사업소가 있음)에서 발굴되었다. 송해붕의 시신은 사건 당시 입고 있었던 천주교 관련 복장과 유품으로 신원을 확인되어 수습이 가능했다.
송해붕의 시신을 발굴할 때, 송해붕의 시신과 같은 구덩이에 있던 다른 시신 5구가 발굴되었고, 그 인근 구덩이에서도 70여 구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 시신들은 신원을 알 수 없는데다가 수습할 방법도 없어 발굴했다가 다시 흙을 덮어야만 했다. 당시 송해붕의 시신 수습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동생 송해숙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당시 오빠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 미래사목연구소에서 바라보이는 천등고개에 가족과 제자 200여 명이 모였어요. 거기에는 미군들이 파 놓은 방카가 있었어요. 예전에 거기서 6명을 죽였다는 소리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어디서 죽였는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삽이니 곡괭이니 가래 같은 거를 가지고 와서 그냥 아무데나 파 보았어요. 오빠 시신을 찾다가 수도사업소 길옆을 팠어요. 소문에는 거기서 70~80명을 한꺼번에 죽였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이 빨갱이 일을 보았다고 그 손자까지도 다 죽였다고 들었거든. 거기를 가래로 파는데 진짜 70~80명 더 되는 것 같은 시신이 나왔어요. 보니까 어떤 시신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올려서 전기줄로 창창 엮었는데 돌멩이로 머리를 짓찧어 죽였어.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중략)… 그런데 거기는 오빠 시신이 있는 곳이 아니니까, 여섯 명이 총살당했다는 곳이 아니니까, 거기는 도로 덮어 버렸지요. 우리는 그 맞은 편 동산으로 옮겨 가지고 제각기 흩어져 찾았습니다. 그런데 까만 남자 고무신 한 짝이 있는 거예요. 까만 고무신이 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근처를 파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6명의 시신이 나왔어요. 오빠는 항상 신학생복(神學生服)을 입고 있었거든요. 그 신학생복을 입은 시신의 윗주머니에서는 묵주가 나왔고, 아랫주머니에서는 데레사 성녀의 상본이 나왔고, 허리 밴드도 나왔고. 밴드는 지금도 집에 있어요.”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던 장문숙·이경창 가족·윤희용·기곽도 가족·이태하·윤섭 등도 송해붕·김기산의 희생과 비슷한 시기에 천등고개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0일 등이 구속된 직접적인 이유는 송해붕의 가족이 1952년경 김포경찰서에 진정을 냈기 때문이었다. 송해숙은 천주교 신자였던 가족들이 1951년에도 송해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인천에 주둔해 있던 벨기에군 천주교 신부에게 호소한 일이 있었다. 임0일 등의 신분장에는 임0일·윤0섭·장0선은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1951년 7월 23일에, 임0석은 같은 혐의로 1952년 7월 22일에 체포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송해숙은 임0석 등에 대한 재판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이들은 재판에서도 총살 과정에 목격한 사실이나 총살 장소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송해붕의 가족이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직접 시신을 찾아야 했다.

재판결과 「특별조치령」 제3조제1호 등에 의하여 임0석·이0선은 각 징역 8년, 윤0섭은 징역 5년, 임0일·장0선·김0창(경찰관)은 각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각 신분장에 따르면, 임0일은 1953년 7월 11일 만기, 임0석은 1954년 3월 17일 형집행정지, 윤0섭은 1953년 9월 18일 형집행정지, 장0선은 1953년 7월 11일 만기를 이유로 출소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수십 명의 주민들을 불법 집단총살한 명백한 중범죄를 지었음에도 결국 가벼운 처벌만 받은 것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김포 부역혐의 희생사건 결정서(2008)
-안영 편,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 미래사목연구소, 2006.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단기4284년 형제351호」(195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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