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지역은 1950년 9월 23일 수복되었으며 유엔군에 배속되었던 여주경찰서 소속 경찰관 일부가 선발대로 복귀하였다. 복귀 당시 여주경찰서가 소실되어 여주국민학교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복귀한 여주경찰서는 사찰계를 중심으로 부역자명단을 작성하였으며, 이들의 색출과 연행은 대한청년단 출신 치안대의 협력을 받아 이루어졌다.

 

여주경찰서

1950년 9월 말경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여주경찰서로 끌려갔다. 당시 여주경찰서는 여주국민학교 강당과 얼음 창고를 임시 유치시설로 쓰고 있었다. 연행된 주민들이 많아지자 여주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주민들이 있었다. 당시 20~30명 정도 되는 주민들이 죄수들처럼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그 둘레에 10여 명의 치안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주민들이 갇혀 있는 동안 여주경찰서 사찰계 경찰들은 이들을 심사하고 A, B, C 3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여주경찰서는 1950년 10월 11일경부터 학살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 10월 11일 여주읍 교리 여주향교 부근에서 총성이 났다. 총성을 들은 연행자의 가족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여주향교 뒷동산 골짜기 방공호에서 20여구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희생자들은 머리에 한 발, 가슴에 두 발의 총을 맞았다.

이 외에 영릉 입구 여주보건소 주변 약수터와 여주읍 하리 양섬(고려병원 뒤) 모래사장에서도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가남지서

여주 가남지역을 수복한 국군은 제6사단으로 잠시 주둔했었다. 국군 수복 직후 가남면에서는 복귀한 가남지서장의 지휘 아래 치안대가 조직되어 부역자에 대한 색출 및 연행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치안대원들에 의해 가남지서로 연행되어 소방서 창고에 임시로 감금되었다. 1950년 10월 소방서 창고에 갇혀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은 경찰의 지휘 아래 치안대에 의해 태평리 공동묘지와 가남지서 뒷산(현 태평터미널 뒤, 태평근린공원 입구) 폭탄 구덩이, 박산고개 등에서 총살당했다. 가남지서 뒷산에서는 20여 명의 부녀자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산은 먼 곳에서도 볼 수 있었으므로 많은 주민들이 이 장면을 목격하였다.

 

대신지서

대신면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각 마을의 주민들이 치안대에 의해 끌려가 대신면사무소 옆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창고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남녀 구분 없이 갇혀 있었는데, 어린아이는 없었다고 한다. 총살은 1950년 9월 30일부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주민들이 희생된 곳은 보통리 강변 송장웅뎅이와 장풍리 골짜기였다. 치안대원으로 동원되었던 김씨는 희생자들을 여주경찰서로 넘긴다면서 끌고 나가 총살한 것이었으며 하루에 22명까지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장풍리 이장이었던 이씨는 장풍리 골짜기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200여 명에 이른다는 말을 들었다.

 

북내지서

국군 수복 후 북내면에서는 당우리와 운촌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치안대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북내지서의 지휘 아래 각 마을 주민들은 지서 앞 창고로 연행했다. 연행된 주민들은 지서의 조사를 받으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1950년 10월 29일경 북내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 중 대부분이 여주읍으로 가는 길목인 북내면 신남리 버시고개와 신남리 새재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10여 명씩 묶여 버시고개를 넘어가던 중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골짜기에서 발견한 구덩이에는 희생자의 시신이 겹으로 쌓여 있었다. 당시 치안대로 활동하던 차씨는 당시 학살당한 시신들이 매장되지 않고 청솔가지로 덮어 놓은 모습을 목격했다. 학살당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는 인근 신남리 주민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신남리 버시고개 외에 새재 골짜기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여주의 유명한 좌익이었다는 오해수의 일가족 5명의 시신이 이곳에서 수습되었다.

이 외에 여주군 북내면 당우리 대왕사 터에서도 13명 정도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포지서

부역혐의를 받아 치안대에게 연행된 금사면 주민들이 면사무소 옆에 있던 이포지서 임시 유치시설과 지서장 사택 지하에 감금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1950년 10월 10일 있었던 국군 수복 환영 대회에 나왔다가 그 자리에서 연행당했다. 당시 치안대원이었던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각 마을에서 한두 명씩은 다 잡혀왔으며 특히 인민위원회 간부가 있었던 외평리에서 가장 많이 잡혀왔는데, “빨갱이 마을에 살았으니 분홍색 물이라도 들지 않았겠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저질러진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희생사건은 1950년 10월 14일의 것이며 이날 이후 이포지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은 옹기정 뒷산 공동묘지와 금사면에서 여주경찰서로 가는 길목인 흥천면 계신리 강변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흥천지서

국군에 의해 여주지역이 수복되자 흥천지서를 중심으로 흥천면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이 인민위원회 등에서 부역하던 주민들을 연행해 고문을 하였으며 흥천지서에 감금하였다. 흥천지서와 치안대에 의해 부역자라고 판단된 주민들은 흥천지서 부근 앞산과 복대리 쇠고개 공동묘지(현 흥천공원묘지)에서 총살을 당했으며 희생자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 발견 당시 희생자는 머리에 총상을 당한 상태였다. 한편 일부 주민들은 가까운 이천경찰서로 연행되어 희생되기도 했다. 한편, 부역혐의가 중대하다고 판단한 주민들은 여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고 하는데, 경미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지서에서 총살당한 사실로 보아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기타(점동면 현수리)

점동면 현수리 보도연맹원이었던 박정봉은 국군 수복 직후 국군 선발대에 의해 당진리 봉골산에서 살해당했다. 박정봉을 끌고 가던 군인들이 “너는 죽었다. 너는 이제 죽었다.”라며 수류탄으로 박정봉의 머리를 때렸다. 박정봉이 총살된 후 그의 형 박정만과 그의 모친 신삼순이 인민위원장과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점동면 치안대에게 끌려가 당진리 가시랏골에서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