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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자 연행과 감금

쇄암리 주민 이달재는 국군 수복 후 피신하던 중 강화로 건너는 광성나루터에서 연행당했다. 그 후 대곶면사무소 앞에 있던 창고에 7~10일간 갇혀 있었으며 그 동안 모친이 창고로 밥을 날랐다. 이달재를 포함하여 당시 쇄암리에서 끌려간 주민은 모두 세 명이었으며 이들이 대곶지서 유치장에 갇히자 그 가족들이 밥을 날랐다. 당시 창고에는 주민 30여 명이 함께 갇혀 있었다고 한다.

이강운은 1950년 12월 초순경 대곶지서 경찰관으로 발령받아 지서에 도착한 뒤, 유치장에 고향 오니산리 주민인 국민보도연맹원 신상규가 갇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 이틀 전까지 유치장에 오니산리 김경섭, 이원상이 함께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로 보아 오니산리에서는 적어도 세 명이 대곶지서로 끌려왔음을 알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는 김경섭과 이원상이 대곶지서로 끌려온 구체적인 경위는 목격자가 없어 확인되지 않았다.

2. 집단 살해

위 이강운은 대곶지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발령 직전인 11월 말경 창고에 갇혀 있던 오니산리 김경섭, 이원상을 포함한 주민들이 대곶지서 너머소라리고개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강운은 이들이 경찰에게 총살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당시 대한청년단원들도 총을 가지고 다녔으므로 그들이 했을 수도 있다고 증언하였다.

증언에 따르면, 이달재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대곶면사무소에서 약간 떨어진 소라리고개에서 수습하였는데, 수습 당시 함께 끌려간 쇄암리 주민의 시신 세 구를 포함하여 대여섯 구의 시신이 현장에 있었다.
이달재의 시신은 모친이 수습하였다. 이때 동생 이덕재도 따라 가서 시신을 직접 목격했는데, 당시 시신은 총을 머리에 맞아 두개골이 없어진 상태였다. 모친은 옷을 보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였으며, 시신에 머리가 없으므로 나무로 머리를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출처, 김포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