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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자 연행과 감금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22일경 마곡리 주민 안삼순은 남편 이기학이 의용군에 갔다는 이유로 양동지서 경찰이 지휘하던 치안대에 의해 양동지서로 끌려갔다. 같은 날 부역자의 가족이란 이유로 함께 끌려간 마을 주민들은 이성재 모친, 김동열 모친, 이옥례 등 여성 네 명과 이수영, 이교영, 이의석 등 남성 3명으로 모두 일곱 명이 두 명씩 묶여 끌려갔다.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자 가족으로 판단한 여성들의 경우, 잡혀가기 전부터 미리 머리의 쪽을 잘라 산발머리로 만들었다.

양동지서로 끌려간 이들은 양동지서 길 건너편에 있던 수리조합창고에 갇혔으며, 한귀님(위 이기학 제부의 여동생, 당시 15세)과 이정옥(안삼순의 딸), 이정례(이의석의 동생, 이정순으로 부름) 등 가족들이 밥을 날랐다. 주민들이 수리조합창고에 갇힌 사실은 양동지서로 함께 끌려갔다가 풀려 나온 이옥례(당시 19세)에 의해 알려졌다. 또한 창고에 밥을 날랐던 이정옥과 이정례는 당시 100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갇혀 있었고, 이성재의 모친이 매를 맞아 머리가 함몰된 모습과 이정옥의 모친 안삼순이 아래옷이 피범벅이 되어 걷지 못하던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희생자들은 가족들이 밥을 나른 지 3일 후 사라졌다고 한다.

2. 집단살해

양동지서로 끌려간 주민들의 희생사실은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정옥은 작은어머니 한라한(韓羅難)으로부터, 주민들이 끌려간 지 5~6일이 지난 1950년 9월 27일경 양동지서 창고에서 밥을 받지 않았으며 창고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희생사실을 짐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이정옥은 “마곡리 한강변에서 사람 뼈를 많이 보았는데 그 곳이 바로 양동면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라는 말을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라고 하였다.

사건 당시 김포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박00도 “양동면 양수장 너머 한강가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많이 희생당한 사실을 들어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안삼순과 함께 끌려간 주민들 일곱 명 가운데, 당일 풀려난 이옥례와 한강변으로 끌려가지 않았던 이수영은 희생을 피했으나 안삼순, 김동열 모친, 이성재 모친, 이교영, 이의석 등 다섯 명은 희생당했다. 이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당시 창고에 갇혀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도 대부분 이들과 함께 희생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출처, 김포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