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생자 연행

수참리 김동철과 최인준은 1950년 9월 28일경 가족들과 함께 마을에서 김포면 쪽으로 피난하던 중 바리미 부근에서 치안대에게 연행되었다. 그들은 김포로 가는 길목인 바리미고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미군차에 실려 미군의 감시를 받으며 김포경찰서로 보내졌다. 그들 외에도 김포경찰서로 끌려갈 주민들이 바리미고개 치안대사무실에 10여 명이 더 있었으나 지역 유지였던 김동옥이 치안대를 설득하여 나머지는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수참리 주민 장경선은 1950년 9월 30일경 부역혐의로 양곡지서로 끌려가 9일 동안 조사를 받았으며 다시 김포경찰서로 넘겨져 10일 후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된 지 1주일 뒤 김동옥에게 불려나가 양곡지서로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정경순은 1950년 10월 10일경 양곡지서에서 왔다고 밝힌 치안대원에게 끌려갔다. 수참리 김동준과 김동기 형제는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김동춘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잡혀갔다.

유현리 주민 황범주는 인민군 점령기에 면사무소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피신하라는 이웃의 권유가 있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부역혐의를 받던 마을 주민 황덕현․심유택과 함께 김포경찰서로 자수하였다. 그 뒤 황덕현과 심유택은 풀려났으나 황범주는 풀려나지 않았다.

2. 감금

끌려간 주민들이 양곡지서에 갇히자 정경순의 자 정봉운(신청인), 장경선의 처 김정숙 등 그 가족들이 옷과 음식을 날랐다.
신청인 정봉운은 밥을 나르면서 정경순을 면회할 수 있었는데, 그때 3~4평 크기의 양곡지서 유치장에 주민 10여 명이 갇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갇혀 있던 주민들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었고 여성들도 있었다. 정봉운은 양곡지서 앞을 지나치던 친구들로부터 “지서에서 매일 고문하는 소리가 났다”라는 말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김정숙에 따르면, 양곡지서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을 통해 남편 장경선이 양곡지서 내 지하방공호에 감금되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김정숙은 이 사람을 통해 남편에게 주먹밥을 전해 줄 수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김동묵은 그의 친구였던 김동기가 1․4후퇴 직전까지 양곡지서에 갇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3. 집단살해와 시신 수습

구금자들은 잡혀간 지 1주일 후부터 면회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살해되었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시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양곡지서 뒷산과 여우재고개, 한강변을 찾아다녔다. 가족들은 1950년 11월 8일경 하성면 전류리 한강변에서 최인덕의 시신을 발견하였으며, 낭떠러지였던 양곡지서 뒷산에서 흙으로 대충 덮어놓은 20여 구의 시신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장경선에게 주먹밥을 나르던 처 김정숙은 밥을 나른 지 1주일 째 되던 날에 지서 창고가 텅 빈 것을 보았다. 그 때 양곡지서 근처에 거주하던 어떤 할머니로부터 “밥을 해 올 필요 없다. 갇혀 있던 사람들은 어제 저녁에 다 끌려 나갔다”라는 말을 듣고 음력 9월 27일(양력 11월 6일)에 남편이 살해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뒤 장경선이 희생된 곳은 구래리 입구 양곡지서 뒷산이라고 전해 들었다.

김동묵은 1․4후퇴 직전 양곡중학교 뒷산(현재 3․1운동만세비공원 뒤)에서 10여 구의 시신이 3~4평 크기의 구덩이에 암매장 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 시신들은 군용통신선에 손을 뒤로 묶인 채 들풀로 얇게 덮여 있었다. 이로 보아 양촌면의 희생지는 양곡지서 뒷산과 양곡중학교 뒷산 등 두 곳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을 종합할 때, 장경선, 정경순, 김동준, 김동기 등 30여 명의 주민들은 1950년 11월 6일경 양곡지서 뒷산과 양곡중학교 뒷산에서, 김포경찰서로 끌려간 김동철, 최인준과 자수한 황범주는 1950년 10월경 여우재고개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인덕은 1950년 11월 6일경 하성면 전류리 한강변에서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출처, 김포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