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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생자 연행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8일 김포면 감정리 주민 신성철은 나무하러 갔다가 국군에게 붙잡힌 뒤 치안대로 넘겨져 김포경찰서로 끌려갔으며, 모친 이정순 등 그의 가족과 같은 마을 주민 정영현의 가족 등도 9월 28일 치안대에 의해 김포면 창고로 끌려갔다. 일자는 불명확하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마을 정순달의 가족 일부는 고촌으로 피신하던 중 고촌면 관청에서 연행되었다.

김포면 운양리 심덕기는 1950년 9월 18일경(음력 8월 7일경) 국군 수복 직후 치안대에게 끌려갔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나는 죄가 없으니 금방 갔다 온다. 너희들은 방공호에 가 있어라”라고 하면서 끌려갔으며 그의 사촌 심현구는 그 바로 뒤에 끌려갔다.

1950년 10월 5일(음력 8월 24일) 김포면 북변리 정순영은 ‘옹짓물(감정리)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 조명순과 생후 4개월 된 딸 정정자와 함께 치안대의 지시에 따라 불려나가 샘재(운양리) 방향에 있는 곡식창고로 끌려갔으며 심사 후 분류되어 김포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양촌면 수참리 주민 김동철과 최인준은 1950년 9월 28일경 체포되어 김포경찰서로 끌려갔고, 유현리 황범주는 1950년 10월경 자수하여 김포경찰서로 끌려갔다.

2.  감금

국군 수복 직후 김포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김포면 감정리 신성철은, 자신이 구금될 때 김포경찰서에 있던 세 개의 유치장은 이미 부역혐의를 받던 100여 명의 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구금 이틀째 되던 날인 9월 19일 밤 12시경 후퇴하던 인민군이 다시 김포로 돌아와 갇혀 있던 주민들이 유치장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이 증언은 신청인 심순옥이 유치장에 갇혔던 자신의 사촌오빠 심현구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왔다고 증언한 것과 일치한다. 즉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18일경부터 김포면에서 치안대가 활동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김포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간 신성철과 심현구는 1950년 9월 20일 후퇴한 인민군의 일시적 반격 과정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김포를 재점령한 인민군이 후퇴하자 김포 치안대가 다시 활동하였다. 1950년 9월 21일경 다시 국군이 이 지역을 수복하자 신성철은 국군에게 자수한 후 운이 좋게 바로 풀려났으나 인천으로 가던 중 다시 잡혀 부평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1950년 10월 19일 석방되었다. 반면, 심현구는 1950년 9월 21일경 김포에서 다시 치안대에게 잡혀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것으로 추정된다.

치안대는 김포경찰서로 끌려 온 주민들의 이름을 확인한 후,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남성은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여성은 경찰서 내 방공호에 감금하였다. 부역혐의에 대한 조사는 김포경찰서 경찰관들이 하였는데 이들은 감금된 주민들에게 인민위원회 활동에 대한 자백을 강요하면서 고문을 했다고 한다. 여성들에게도 말채찍 모양의 흉기로 손바닥을 때리는 고문을 했는데, 당시 고문을 당했던 정순영의 처 조명순은 “장사를 하는 가게에 좌익이 드나든 사실을 말하라면서 매를 맞았으며 1주일 후인 1950년 10월 11일 남성들이 끌려 나가고 비어 있던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다시 1주일 동안 취조를 당했다”라고 증언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치안대에게 끌려간 이정순, 정영현 등 어린이들이 포함된 김포면 감정리 주민들은 김포면 창고에 하루 동안 감금되었다.

3.  집단 살해와 암매장

참고인 신성철은 끌려간 지 한 달 만인 1950년 10월 19일 부평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들이 김포면 장릉산 독잣굴에서 1950년 9월 29일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신성철은 독잣굴 현장에서 살아나온 같은 마을 소녀 정광순과 현장에 가 보았으나 가족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감정리에서는 이외에도 황씨 일가족, 정남석 일가족, 정형모 일가족 등 60여 명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정광순은 당시 총탄을 빗맞아 생존할 수 있었는데, 현장에서 빠져나온 뒤 참고인 정○○이 치료해 주어 살 수 있었으나 4년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편, 조명순은 “내가 김포경찰서에 연행되기 전에 운양리(샘재) 등 여러 마을의 사람들이 북변리 김포국민학교 있는 쪽 산(장릉산)으로 끌려갔고, 그 후 총소리를 들었으며, 남편 정순영이 죽은 뒤에도 김포경찰서에서 주민들을 몇 번 더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증언하였다.

김포경찰서는 주민들을 연행한 지 1주일이 지난 1950년 10월 11일 유치장과 방공호에 감금된 주민들을 나오라고 하여 다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이 때 조명순은 다른 집단에 속해 있는 남편 정순영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경찰은 남편 정순영이 속한 집단의 주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으나 아내 조명순이 속한 집단의 주민들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이때 조명순은 유치장 담당경찰들이 주먹밥을 받은 주민들에게 “아 저 사람들 오늘 밥 한 술씩 먹고 좋은 데로 가는 거야”라고 하며 조롱하는 말을 들었다. 잠시 후 조명순은 정순영을 포함하여 밥을 먹은 주민 100여 명이 전깃줄에 묶여 2대의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조명순은 나중에 그들이 여우재고개로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그 곳에 있던 큰 웅덩이에 매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촌면 수참리에서 연행되어 김포경찰서에 구금되었던 김동철, 최인준과 양촌면 유현리 황범주도 이때 여우재고개에서 같은 시기에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김포면 운양리 심성기, 심현구, 심덕기도 김포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총살당한 것이므로 이들 역시 1950년 10월경 여우재고개 또는 장릉산 독잣굴에서 희생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 조명순은 1951년 가을에 희생된 주민들의 유족 서너 명과 함께 남편 정순영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여우재고개에 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여우재고개의 웅덩이에서 흙과 솔가지에 덮여 있다가 장마로 드러난 유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유골들의 팔은 통신선으로 묶여 있었고, 입고 있던 옷도 부패되어 알아 볼 수 없었으며, 여성들이 묻혔던 곳에는 쪽머리가 돌아다니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모습은 감정리 주민 정○○에 의해서도 목격되었다. 정○○은 “1954년경 여우재고개에 갔더니 시신들이 네 겹으로 쌓여 있었고, 이 시신들이 아래 개울까지 흘러 내려간 모습을 볼 수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정봉운은 모친으로부터, 당시 부친 정경순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우재고개에 갔다가 흙에 살짝 덮여 있는 시신들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감정리 윤종호는 “여우재고개에서 사람 뼈가 많이 나왔으며, 김포국민학교 뒤 충혼탑과 공군부대에서도 많이 나왔다”라고 증언하였다.

사건 당시 김포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박00도 “여우재고개의 웅덩이에서 200명 내지 400명에 이르는 많은 주민들이 총살당한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증언하였다.
참고인 정○○은 “정순달과 그의 며느리 한말려와 손자가 김포 공설운동장에서 희생된 것으로 안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보아 증언을 통해 확인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사건이 김포 여우재고개와 장릉산 독잣굴 등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김포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