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20 19:16 수정 : 2013.05.20 19:16

 

보내기
1363601590_00119182501_20130319.JPG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가도 너무 멀리 갔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용납하고 인내할 수 있는 수위를 한참 넘었다. 5·18 항쟁 당시 총을 든 사람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게릴라라고 공공연히 조선·동아 종편 방송에서 언급을 했다. 그들을 민주화 유공자라고 부르기 싫어하는 심정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북한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니? 이건 생존해 있는 현장 시민군을 욕보이는 일이고, 희생당한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닌가? 사건 당시 학살을 자행하던 신군부는 구속자들을 고문하여 간첩으로 몰려고 했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간첩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나중에는 이들을 ‘김대중 추종세력’이라고 스스로 고쳤다. 세상에 공작금 받고 목숨 바칠 인간이 어디 있는가? 만약 북한 게릴라가 광주까지 진입했다면, 휴전선이나 배를 타고 천릿길을 남하하여 ‘폭동’을 준비할 동안 수많은 군경 경비요원은 무엇을 했나?
 

술집의 허접스러운 대화에서나 나올 이야기가 종편을 타고 공공연히 유포되고, 일베 사이트를 통해 바른 역사교육을 받아야 할 청소년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고 있다. 급기야 항쟁을 하다 총을 맞아 죽은 시신까지 조롱하는 내용까지 유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광주 5·18을 폄하하고 싶어하는 그 어떤 세력들도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시신까지 조롱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5공 세력과 수구언론은 1987년 이전에는 폭력적으로 ‘기억의 상실’을 요구했고, 가해자 처벌을 끝까지 거부했으며, 민주운동을 오직 ‘광주의 폭동’으로만 축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제 기억이 희미해지고, 그들에게 유리한 정치환경이 조성되자 ‘기억의 조작’까지 시도하고 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종북’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을 용납하거나 부추겨온 그간의 정치상황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무슬림에 대한 ‘증오범죄’는 평소에 이슬람 문명을 비하해온 미국의 서구중심주의 정치문화의 산물이며, 나치의 600만 유대인 학살은 “지구상에 유대인이 없다면 능히 유대인을 창조라도 해낼” 반유대주의가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광주 5·18을 북한과 연계시키려는 것은, 북한과 공산주의를 욕하면 그 어떤 패륜적인 범죄도 용납해온 한국 반공주의의 귀결이다.
 

세계사를 보면 어떤 잔혹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도 순순히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은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심리적 욕구 때문에 힘이 있는 한 피해자의 자백과 정치적 전향을 요구한다.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고 가해 사실을 잊도록 만드는 것이 일차 목표이지만, 더 자신감이 생기면 아예 자신이 한 일은 ‘사회의 좀벌레’를 제거한 당당한 일이었거나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5·18 가해자들에게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항쟁세력이 남한의 ‘공공의 적’인 북한과 연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최대의 약점이 해소되고, 이제 현실권력을 넘어 역사인식의 고지까지 점령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이 나치 학살 부인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한 것도 학살의 부인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야만적 행위를 옹호하는 범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조작까지 넘보는 한국과 일본의 극우에게는 이제 진실도 무의미한 지경까지 왔다. 반인도적 국가범죄를 부인하는 정도를 넘어서, 이제 언어테러까지 해도 우리가 그냥 넘어가야 하나?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